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상 Jul 05. 2022

보라의 방향

제주를 훔치다 8.

  

  시작, 처음, 첫(시작)점... 이와 같은 단어들에서 나는 설렘보다는 아픔과 힘듦 같은 묵직한 감정을 더 먼저 느낀다.  누구의 시작이었던, 그 시작이 크든 작든, 어떤 동기를 가졌든 잠깐이라도 마음에 안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작은 예의로 1코스를 아껴둔다.

  몇 년 전 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도 거짓말 안 보태고 하나도 기쁘지 않았던 기억, 자의가 반이었기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어 속절없이 피는 벚꽃에게 서운했던 기억, 이 꽃들이 세 번 피고 지면 임기가 끝나겠구나,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던 쓸쓸한 기억.. 그 기억들이 아직은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라고나 할까.   

  두툼한 안개가 바다를 점령하고 있다. 안개바다다. 때문인지 내 마음도 습도 90%,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모든 길들이 짠 듯 금세 리본은 좁은 비포장도로로 안내한다. 시작점인 광치기 해변을 몇 번을 오갔는데도 바로 옆, 이 길은 처음이다. 반듯하고 큰길로만 다녔던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걸음도 기꺼워하자. 걸어온 길과 걸어야 할 길이 극명하다.



삶, 길의 순환



  식산봉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궁금해지는 구간을 지난다.

‘모란동백’으로 책을 짓고,

‘젊었을 때 일본에서 10년 일하고 70년대 다시 오조리로 돌아와 살았죠.

제주도 축구 대표 선수로도 살았고, 참, 내가 마을 이장도 한번 했었지, 허허.’

  성산에서 일본으로 배가 오가던 시절, 많은 청년들이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떠났다고, 다시 돌아와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어느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

 여백의 미, 소나무 숲, 각도와 거리 면에서 성산 일출봉은 오조리 식산봉에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10분, 45미터만 오르면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아름다운 설명을 해놓은 이들. 마음이 물컹해진다.  

 자리든 봉우리든 높이 올라가는 것은 젬병이지만 어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마음도 이미 말랑말랑해져 버렸으니. 야트막한 정상에 올라 성산 쪽을 바라보니 안개에 가려져 잿빛뿐이다. 식산봉이 여기에 있으니 일출봉도 거기 있으려니 한다.



모란같은, 때론 동백같은 인생


 

  기분 좋게 한 잔 하셨나 보다. 길바닥에 몸을 부린 어르신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버릇없는 나도 꼭 조여 둔 경계를 풀고 인사를 건넨다. 어찌 지치지 않은 생이 있으랴, 어찌 부리고 싶을 때가 없으랴, 나 또한 육지에 나를 부려두고 여기에 있는 것을, 오조리 바다의 쌍월처럼 나도 두 개, 마음도 두 개이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을.

  식상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고인 것은 썩기 마련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제주 바다라도 어쩔 수 없다. 바다의 변두리, 오조리 속 깊은 곳까지 밀려든 비닐들, 거기에 멈춘 바다가 말없이 썩고 있다. 그러니 쉼 없이 출렁이기라도, 파도라도 쳐야 한다.

  산지로 접어들자 습도의 점도가 점점 높아진다. 안개 알갱이들까지 더해져 살갗이 풀을 바른 듯 진득거린다. 호박밭을 지난다. 꽃이나 잎은 일반 호박과 같은데 열매는 조그마한 밤호박이다. 껍질과 속이 단단해서 칼집 내기도 어려운 열매. 모종의 어느 부위, 그것이 크는 어디쯤에선가 단단함으로 방향을 달리했으리라. 환경은 비슷해도 맺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한다. 오늘의 나도 어디쯤에선가 어떤 무엇이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겠지. 파종할 준비를 마친 단아한 밭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맺어질지 궁금해진다.

   혼인지로 든다. 세상에. 뜻밖의 수국들, 만개해 있다. 그곳의 수국 소식은 금시초문이었다.  우연의 보랏빛에 남몰래 들떠서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돈다. 보랏빛의 방향은 어느 쪽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순방향의 보랏빛에 물들어 혼인 중인 사람, 혼인한 사람들이 거기 있다. 그리고 혼인을 물릴 수만 있다면 보라의 역방향쯤으로야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거기 있었다.

       


보라의 방향



  온평포구, 도착점이다.  끝맺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이 끝나고 걸음이 끝나고.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들른 편의점의 그녀도 혼자 여행하다가 제주에 눌러앉은 지 7년 됐단다. 그중 5년은 여행처럼 살았다고. 세상에는 멋진 사람들이 이리도 많다. 나는 쨉도 안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의 또아리를 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