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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l 12. 2022

세상의 중심에 비와 나, 둘 뿐

제주를 훔치다 9.

  어제의 도착점이 오늘의 시작점이다.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는 것. 장마도 이미 시작되었고 폭우는 나와 동행한다. 걸을만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숙소를 나와 보니 굵은 빗줄기에 바람까지 품고 있다. 어쩔 거냐고? 못 먹어도 고다. 삶이 그리 적당하기만 하던가. 적당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바람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비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위협적인 바다와 천둥까지. 걷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열 가지는 넘는 날이지만 맞은편에서 사이클을 탄 청년 두 명이 빗속을 환호하며 달려온다. 나 같은 인간들이 또 있다니 문득 다행이다. 

  와중에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라는 푯말이 비바람 속에 박혀 있다.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가. 영원을 요구하니 영원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푯말에게 말해준다. 사랑도 닳는 것이라고. 그러니 영원 같은 건 약속하지 말라고. 약속은 말 그대로 깨기 위해 하는 거라고. 나는 동에서 서로 가고 바람은 서에서 동으로 가는 것처럼 사랑은 어긋나고 부딪힌다. 그러고 보면 첫사랑이 그리운 건 영원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애틋하게 마주하고 있는 저 바다와 수국은 어쩔 수 없고, 이방 저방 해도 서방이 제일이라고 했던 어느 스님의 말도 어쩔 수 없다. 

긴 마주봄이라도 어쩔 수 없고



   리본이 가라는 길로 접어드니 금세 산길이다. 오늘 같은 날 빗속을 뚫고 산길을 홀로 걷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아 의도적으로 이탈을 감행한다. 어디쯤에선가 놓친 리본을 다시 만나겠지. 바닷길, 산길을 싹둑싹둑 잘라먹고 걷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리본이 나타난다. 내가 가지 않은 그 길 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조금은 아쉬운 내 마음 사이사이에 두려움 한 고랑, 호기심 한 고랑씩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두려움이, 때로는 호기심이 나를 지배한다.        

  아무도 들지 않은 신산리 마을카페에서 축축하고 찬 기운을 식힌다. 어린 바리스타와 나 둘 뿐인 공간을 독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 커피 향이 맘 놓고 퍼진다. 통유리창에 거세게 맺히는 빗방울 소리를 귀에 담기도 하고 해안도로를 덮치는 파도도 여유롭게 맞이한다. 갈 길은 절반이나 남아있고 비는 멈출 기미가 없으나 좋은 건 그냥 좋다.

그날, 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은 비의 일이었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연해지더니 옅은 햇살이 나오기 시작한다. 어서 가, 말하는 것 같아 재빨리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20, 30분쯤 걸었을까 차량 진입을 막고 선 입간판이 나에게만 입장을 허락한다. 걷는 자의 특권이다. 조금은 우쭐해진 기분으로 신풍 목장 길로 들어 물 고인 잔디를 첨벙첨벙 걷는다. 운동화 속까지 물이 잠긴 지 이미 오래여서 일부러 빗물이 고인 곳만 골라 딛는다. 

  어릴 때 집 앞길이 넘실거리게 비가 오는 날이면 검정 고무신을 신은 채로 첨벙 대며 뛰놀았던 기억이 솟는다. 어느새 마을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집 저 집에서 밥 먹으라는 소리가 담을 넘어오곤 했다. 어린 날이 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어느 형편에 서 있든 그 삶을 견디고 건너가게 하는 힘이다.  모든 사람들의 어린 날이 사소해도 찬란했으면 좋겠는 이유다.   

  다시 비가 내리고 말라가던 옷이 젖는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다가 잠깐 볼록거울 속으로 비를 피해 들어간다. 다 왔어, 힘내, 속삭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바다를 벗고 하얗게 드러낸 모래톱을 가로지른다. 발바닥을 감싸는 폭신함이 꿈속에서처럼 더디고 무겁다. 이미 빗속이었고, 물먹은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며 도착점은 코앞이다. 

비를 피해 볼록 거울 속으로 



   비바람 코스. 이 길에는 경계가 무너진 하늘과 바다, 바다와 섬이 있었고, 폭풍우가 있었으며 그 속을 걷는 사연 많은 여인이 있었다. 

  내일, 계획대로 걸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나에게 도착점에서 놀라움과 따듯함으로 맞이해준 그녀는 추자도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1박 2일도 짧다며 꼭 2박 3일로 가라고. 아직 비가 그치지 않은 내 마음속으로 추자도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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