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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l 19. 2022

차라리 눈을 감아 속도를 직면하다

제주를 훔치다 10.

   새벽 4시가 채 되기 전에 눈을 뜬다.  동시에 소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제 답장 못 해 준 톡, 엊그제 나눴던 이야기, 내일모레 있을 회의... 여기에 홀로 있으나 거기에 여럿이 함께 있다.  언뜻 다시 잠든 것 같았는데 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듣는다.  아무려면 어때, 어제 그 빗속도 걸었는데. 경험이 준 여유다.

  비가 그치고 아직 걷히지 않은 구름 곁에 하늘이 푸른색 우표처럼 붙어 있다.  평화가 배가 되는데 금세 발은 아파오고.. 비와 습도와 더위의 3일째, 아무래도 무리가 되었나 보다.  하도 방향의 코스, 내 맘을 읽었는지 수국도 직진이고 이정표도 직진인데 야속하게도 리본만 우회다.  그리고 맞이한 지미봉, 완만함을 품은 곡선경사가 아닌 40도쯤 되는 직경사다.  성산포가 아무리 뒤를 봐주고 등을 밀어도 산길에 주저앉고 만다.  제법 속도가 있는 어지럼증을 타고 나도 돌고 나무들도 돌고 제주가 돈다.  차라리 눈을 감아 내 삶의 속도를 직면한다.  아, 이리 살고 있구나 여유 한 가닥 끼워 넣지 못한 채 여백도 없이.   

  돌을 짊어진 것 같이 무거운 몸을 끌고 기다시피 도착한 지미봉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스꺼움과 현기증 뿐.  잠시 속도를 식히고 숨을 고른다.

현기증과 메스꺼움과 성산포

  


  비슷한 경사에 계단마저 없고 미끄럽고...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다.  내려와 보니 간세는 ‘가파르지만 2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간세 씨, 이건 아니지. 20분 정도 소요되지만 가파르다고 해야지.  그래야 사람들이 우회를 택할 수도 있지.  애먼 간세에게 역정이다.  때때로 올레길의 어느 구간은 잔인하다.  3분의 1도 걷지 않았는데 오늘 치 기력이 다 소진되고 말았다.

  다시 접어든 바닷길에서 처음 본 돌하르방이 커다란 하트를 날리며 히죽이 웃는다.  사랑해요. 힘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미소를 짓는다.  흠, 제주의 센스라니! 나도 손 하트를 쏴주고.  그나마 오늘은 바람과 합이 잘 맞는 날이다.  한 방향이다.  차로 이 길을 지날 때 걷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꼭 걸어야지 했었는데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다.  차로 오가는 사람들은 무더위 속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제 그 빗속을 걷던 나를 보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랑해요. 힘내요.



  수년 전 여름, 중학생이었던 두 아이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걸었던 적이 있다. 일정상 전 구간을 걷지 못하고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아이들은 피곤에 지쳐 잠들고 띄엄띄엄 사람들이 빗속을 걷고 있었다.  왜 걸을까 무슨 사연을 품었을까.  마음 끝에서는 이미 시큰함이 시작되고 있었다.  말하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모두가 불편했고 불안했고 외로웠던 그 여정이 모든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북받쳐서 눈물 콧물 찍어냈던 기억이 어제 일만 같다.  언젠가 꼭 다시 걷고 싶은 길, 지금은 그 길이 마냥 그립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하고 다짐한 게 있다면 용기 있게 시도해 보길 바란다.  물론 나도 그럴 테니.      

     

  밭길에서 이어지는 하도리가 대부분 돌이다. 돌집, 돌 창고, 돌담... 까치발로 잘 다듬어진 집들을 살짝 들여다본다.  돌담에 기대어 보기도 하고, 돌 위에 앉아보기도 하고.  많은 이들의 꿈인 제주 돌집에서 일 년 살아보기, 한 달이라도 살아보기, 아니 2주 만이라도... 나 역시 품고 있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데 오늘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언제쯤 오늘이 될까.

  비 온 후 말개진 속살에 통통한 고랑을 낸 알밤색 들을 지난다. 검정에 가까운 알밤색 흙이 이토록 맑고 정갈하다니. 역시 돌담으로 밭의 경계를 짓고 그 경계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언젠가는!



  ‘낯물’ 마을에 있는 ‘밭길’이라는 뜻을 지닌 면수동의 옛 이름 낯물 밭길에 접어든다.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놓고 물 한 모금에 진녹색으로 반짝이는 느티나무 이파리와 하늘 한번 올려다본다. 밭갈이로 분주한 경운기 소리, 그 사이로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는 마을회관 벽을 타고 오르는 저 능소화로 경쾌하게 핀다. 촌로들의 한가로운 걸음, 휴식은 언제 어디서든 꿀맛이다.

  종달리, 하도리, 별방진, 낯물 마을, 토끼섬 등 어여쁜 이름을 품고 있는 구간이다. 언젠가는 걷기보다 마을 속속 들여다보기를 해야지.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쌓는다.

  더위 먹은 속은 스꺼움에 지쳐 울렁거리는데 가야 할 길은 아직 남아 있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숙소로 이동해야 할 일이 까마득하게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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