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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02. 2022

그저 적막했던 것, 참으로 혼자였던 것

제주를 훔치다 3.

  한 숙소에서 머무르다 보니 시작점을 찾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시작점인 쇠소깍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간다. 대부분 제주여행은 렌터카를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유명 관광지를 둘러본다거나 경치 좋은 곳에 잠깐 멈추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 여행은 버스를 타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다 보니 가보았던 곳도 새롭게 보인다. 보이지 않았던 제주의 집들, 그 사이로 밀려오는 바다들. 풍요롭고 섬세하다. 

바다와 나무, 서로를 채우고

  

  작년 이맘때, 한림항에서 저지로 가는 길이었다. 월령 포구를 지나자마자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가 웬만큼 오면 그냥 걷자고 계획한 날이어서 배낭은 저지 숙소로 이미 보낸 터였다. 비를 피할 만한 나무 밑과 처마 밑으로 조금씩 이동하며 기다렸지만 여간해서 그칠 것 같지 않고 되레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결국 택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짐과 사람이 각자 택시를 타고 비용을 지불하고.  

  숙소에서 보는 저지오름이 쏟아지는 빗줄기의 각도로 기울고 있었다. 막 뜨끈해진 방에서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믹스커피로 속을 데웠다.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나도 산의 각도로 이울었던 것, 바람소리, 빗소리에 스며 절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저 적막했던 것, 참으로 혼자였던 것.  거짓말처럼 맑아진 다음날 아침 그 길을 되짚어 월령 포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온 들과 하늘은 맑음의 최고점에 달해 있었고 드넓은 밭에는 희디흰 감자 꽃이 피고 있었다. 이런 날을, 이런 제주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느 때, 어느 것들은 기준점을 넘어서면 되레 서글픔을 가져온다. 그날의 맑음도 넘쳐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 가난한 한때를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냈던 친구, 조금 살만해지자 친구는 아프기 시작했다. 관리를 잘하며 견뎌냈다 싶었는데 그녀는 모든 걸 두고 떠났다. 울지 못한 채 내 안에 쌓여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도 내 눈물도 월령 바다 흰 파도에 묻혀 갔다. 그녀가 ‘내 몫까지 살아줘’라고 저 바다 어디쯤에선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난 다시 살아내야 했다.  


  다시 길을 놓친다. 삶은 잡고 있던 것들을 끝없이 놓치는 것, 혹은 놓는 것. 그것들을 모두 합친다면 그 양과 길이는 얼마나 될까? 지난날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놓친 것은 묵은 일상이고 잡은 것은 예기치 못한 로망이었던가. 그마저도 묵은 일상이 되는 오늘 멀리 낚시꾼들이 바다를 낚는다. 어쩌면 저 사내들은 낭만을 낚아 올리는지도 모르겠다. 

  리본은 바닷가 바짝 바윗길로 나 있다. 계획된 시련을 걷는다. 삼삼오오 손을 잡아주고 이끌어주는 사람들 틈새에서 나 홀로 걷는다. 둘, 셋도 좋겠으나 내가 견딜 수 있는 둘, 셋의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아서 차라리 혼자가 낫다. 나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누군가를 감당해야 하는 여행이라니. 또 그 누군가로 하여금 나를 감당하게 하는 것도 편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둘, 셋 이상 가더라도 하루, 이틀은 꼭 혼자 보내야만 그 시간이 완성되는 것 같다. 이런 나더러 친구들은 '참으로 특이한 년'이라고 하지만 어쩔 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삼삼오오들이 바다에 붙어 사진을 찍느라 왁자지껄이다. 삼삼오오 몫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고 내 몫의 즐거움이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비켜 앞서 걸으며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불쑥불쑥 들어와 있는 바다를 담는다. 

  한참을 가다가 맞닥뜨린 도로끝. 습관처럼 왔던 길을 돌아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길 잃은 아이처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도로 끝 뒤로 소심하게 흔들리고 리본을 이내 찾아냈다. 

 ‘도로끝’, ‘진입금지’라고 붉게 서 있는 표지판들이 주는 불친절한 막막함에 부딪힐 때가 있다. 낯선 공간에 홀로 뚝 떨어진 기분이랄까. 절벽이라고 느껴지는 곳. 그때는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라. 안도의 리본이 그곳 어딘가에서 묶여 있으리니.   

도로끝, 삶의 시작

 

  소라의 성에 배낭을 부린다. 한때 해물탕으로 유명했다는 곳, 지금은 서귀포시가 북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바다를 마주하고 편하게 책을 볼 수 있다. 차를 마셔야 한다는 부담감도,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도 없이 원한만큼 기대어 있을 수 있다. 책 한쪽, 바다 한쪽, 번갈아 읽으며.       

  연보랏빛으로 봄을 점령한 무꽃 길을 지나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성게 미역국'을 크게 써 붙인 식당으로 들어선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울퉁불퉁해질 때, 마음에 가시 같은 것이 돋으려고 할 때 나는 미역국을 먹는다. 모래알처럼 깔끄러운 마음을 쓸어내기에 미역국만 한 음식도 없기 때문이다. 미끈한 미역과 푹 우러난 국물이 스크래치가 난 내 마음과 삶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늘 먹던 미역국에 비해 국물의 부드러움이 덜 했지만 나는 금방 애 낳은 여자처럼 한 그릇 뚝딱 비운다. 

무꽃, 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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