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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배우를 찾아서

빅토르 에리세 <클로즈 유어 아이즈>

by 김채미

아치형 모양으로 난 길쭉한 창문에서 빛이 쏟아진다. 창문 옆에는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노란색 커튼이 걸려있고, 커튼 앞에 설치된 흰색 새장 안에는 푸른빛을 띤 작은 새가 이따금 지저귄다. 미겔은 주위를 살피며 자신 앞에 앉아있는 신경외과의사의 말에 주시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뇌가 손상되어 있었죠. 그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잃었고, 자기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름도 여러 개를 이야기했어요. 물어볼 때마다 직업도 바뀌었죠. 그럼에도 그 모든 이야기는 진짜 같았어요." 의사의 말에 미겔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그런데 이름이란 뭔가요?"

그러자 의사는 미겔에게 상체를 기울여 가까이 다가간다.

"좋은 질문이네요. 당신 내면에 친구의 삶이 들어있지 않나요? 그건 우리 의사들도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죠. 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줄 거예요. 사람은 기억 그 이상이에요."

미겔은 결심한다. 33년 만에 찾은 과거를 몽땅 잊어버린 친구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화를 보여주기로.


영화는 감독이었던 미겔이 33년 전,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갑자기 사라진 한 배우의 행방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유명 배우이자 미겔의 오랜 친구였던 훌리오의 행방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방송에 미겔은 인터뷰에 응하게 되고, 미겔은 훌리오의 발자취를 따라 과거에 영화 제작을 함께했던 동료들을 찾아간다. 훌리오의 딸, 함께 촬영을 했던 촬영 감독, 훌리오의 옛 여자친구, 그렇게 자신도 잊고 싶었던 과거를 더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곽 마을에 있는 한 정신병동에서 연락이 온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가 방송에 나왔던 배우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미겔은 반신반의하며 정신병동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고,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잊어버린 훌리오를 발견한다.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오랜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훌리오를 보고, 미겔은 한동안 정신병동에서 시간을 보내며 훌리오를 관찰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내 훌리오의 모든 행동 속에 기억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옛 애인에게 배웠던 노래를 부르며 탱고를 추고, 손재주가 좋아 젊은 시절 수리를 도맡았던 것처럼 정신병동에서도 전문 기술자로 일을 한다. 미겔이 훌리오와 추억에 담긴 노래를 부르자, 훌리오는 자신도 알고 있다면서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모든 행동이 훌리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는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훌리오를 검진했던 신경외과 의사의 말을 듣고, 미겔은 훌리오가 남긴 마지막 작품을 상영하기로 결심한다. 훌리오가 사라짐으로써 미완성으로 남았던 영화를 최초로 상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겔은 정신병동 근처에 낡고 작은 영화관을 빌려 영사기에 필름을 돌린다. 그러자 디지털 시대와는 엇나간,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영사기를 통해 재생되는 영화는, 영화 초반부와 이어진다. 죽음을 앞둔 늙은 노인이 마지막으로 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 남자(훌리오)에게 부탁하고, 남자는 노인의 딸을 데리고 온다. 딸을 만난 노인은 감격에 겨워 일어나지만, 딸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자 노인은 딸과의 추억이 담긴 노래를 피아노를 치며 부른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를 기억해 내고 눈물을 흘린다. 노인은 피아노에서 일어나 딸 앞으로 다가가고, 손수건으로 딸 얼굴에 덮인 짙은 화장을 지운다. 그러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져버린다. 딸과 남자는 노인 곁으로 다가가 임종을 지켜보고, 둘의 시선은 이내 카메라 정면으로 향한다. 딸과 남자는 영화 속에 있는 미겔과 훌리오, 관객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는 동시에 이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도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영화는 끝이 나고, 미겔은 훌리오를 바라본다. 훌리오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화면은 어두워지고, 이 영화의 제목인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뜨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눈을 감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보고 싶지 않아서일 테고, 또 다른 하나는 깊은 여운을 느껴 온몸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싶을 때일 것이다. 영화는 '눈을 감는 행위'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과거에 여러 실패와 좌절을 겪고 현재를 살아가는 미겔은 실패한 영화감독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살아왔다. 훌리오 역시 치매를 겪고, 이를 외면하기 위해 사람들 곁을 떠난다.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삶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살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미겔은 훌리오를 찾아 나서는 여정에서 과거와 만나게 되고, 훌리오 역시 자기 과거의 상징인 미겔을 마주하게 된다. 감았던 눈이 떠지고 두 사람의 과거인 영화가 상영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훌리오는 눈을 감는다.


이 행위는 앞선 '눈을 감는 것'과 다르다. 외면이 아닌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화 속 인물은 이미 33년이 흘러버려 지금의 자신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유물 또한 현재의 훌리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미겔의 의도가 가닿았음을 보여준다. 낡고 현재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버려진 필름 영화 하나가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과 기억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꼭 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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