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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한 꺼풀 벗겨내는 작업

서울시립미술관 <자연의 속삭임 박광진>, <김인순 컬렉션>

by 김채미

진국은 네 번째 공간이었다. '자연의 소리'라는 소제목이 붙은 공간 벽면에 짙은 갈색 대지 위로 흩날리는 억새풀들이 확대되어 그려져 있었다. 억새풀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마치 거대한 억새풀 사이를 걷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 두 개의 캔버스가 맞닿아 제주의 한라산을 표현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각 캔버스 위에는 검은 선이 길게 뻗어 마치 밭을 가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고, 그 위에 한라산이 능선을 그리고 있다. 하나는 왼쪽에서 또 다른 하나는 오른쪽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산맥은 캔버스가 만나는 중앙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완벽하게 백록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실적으로 억새풀을 담아낸 작품과 다르게 추상적인 부분이 들어가 자연이 주는 여백의 미와 웅장함을 더욱 잘 담아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그렸던 화가 박광진이 50대 중반에 이르러 화법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예순을 넘어 200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은 더욱 빛난다. 제주에서 생활하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화가는 제주의 노란 유채꽃 풍경을 면으로 담았다. 작품은 오직 면과 선으로만 넓은 들판과 하늘, 꽃밭을 표현하는데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면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불어서 풀들이 스치는 소리, 유채꽃이 풍기는 향기, 침착하게 가라앉은 고요한 하늘까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 속에서 사실적인 건 오직 꼿꼿하게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뿐이다. 그것이 거대한 자연 안에 속한 인간이라는 듯이, 나무는 외롭지만 굳건하게 들판 위에 서있다.


박광진 화가의 작품들을 관람하고 2층으로 올라가 김인순 화가의 작품들도 감상하였다. 김인순 화가 역시 60세를 넘기고서 새로운 화풍을 발견하였다. 이전까지 사회운동의 모습을 가감 없이 캔버스에 표현하고, 여성 인권과 여성이 가지는 고통을 '뿌리'라는 소재에 계속해도 몰두하던 그녀는, 예순을 넘기고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태몽> 시리즈를 완성하게 된다. 우리나라 무속 신앙을 상징하는 상징물들과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강렬한 채도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전통 문양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두 화가 모두 60을 넘겼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움을 탐구하고 끝없이 자신을 탈피했던 것이다.


개인전에는 이런 특별함이 있다. 한 작가의 생을 깊게 들어가, 작가의 소재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갔는지, 어떤 화풍으로 다시 발전하고 섞이는지, 과정을 살피다 보면 경이로움까지 느껴진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니 늙음의 정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인간은 몸의 노화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끊없는 탐구는 정신의 늙음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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