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토미 아유무 <단단한 삶>
"그래서 단언하면 안 돼. 봐봐. 과거에 내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말을 했어도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경우가 많다고. 과거의 말과 지금의 말이 충돌하는 순간이."
인터넷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논란들을 보며 M팀장님이 말을 꺼냈다. 팀장님은 그러니까 말 조심해야 해,라는 말로 끝을 맺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다른 끝맺음을 짓고 있었다. '과거의 말과 충돌', '깨지고 깨뜨리고.' 몇 개의 단어들을 되뇌면서, 삶은 평생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명제와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 근래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서 보았던 작가들의 변모하는 작품들과 같이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개념과 명제들이 깨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유도하는 것처럼 내가 집어든 책과 선택한 영화에서 흘러나온 문장과 대화들이 과거의 내가 단언했던 말들과 충돌하고 있던 것이다.
첫 번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명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온전히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에 나온 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기분이었다.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표기한 것에 대한 기쁨과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문장이 주는 나약함에서 느끼는 불안함. 너무나 명확한 명제를 왜 자꾸 사람들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며 각인시키려는 듯이 내보이는 것일까.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 주는 두려움이 있다. 알고 있지만, 나는 아니길 바라는 마음. '어쩔 수 없음'을 많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목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일 테다. 그렇기에 그것을 밀어내고 계속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댔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명백한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체념과 절망과는 다르다. 명징하다고 해서 그 문장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똑바른 눈높이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알게 해 주기 때문에 슬픔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은 계속해서 삶을 굴린다. 굴려야 한다. 그 속에서 예찬이 피어나고, 작은 경탄을 맞이할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두 번째, 진정한 자립이란 의존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핸드폰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이불 안을 파고들려고 하는데, 책상 위 책꽂이에 놓인 한 책이 우연히 밟혔다. 재작년에 사고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책 커버에 내 생일 숫자가 붙어있는 책이었다. 일명 '생일 책'으로, 책 커버에 '월일'만 붙여 판매하는 독특한 마케팅에 구매를 한 책이었다. 구매를 한 다음, 내용을 살펴보니 흔한 '자기 계발서'인 것 같아 읽지 않은 채 방치해 두었었는데, 이상하게 그날 밤 책에 손이 갔다. 잠들기 전 한 페이지만 읽어볼까 하고 첫 장을 넘기는데 힌 문장이 눈에 밟혔다.
'진정한 자립이란 의존하는 것이다.'
상충하는 문장이었다. 자립은 홀로 일어서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진정한 자립이라고? 요 근래 상충하는 의미를 지닌 문장처럼 상충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던 나였기에 단숨에 몇 페이지를 더 읽었다.
내 마음속에서 충돌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혼자서, 독립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문장과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누군가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문장이었다. 두 문장 모두 맞는 명제이고, 이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함이 좋은 능력이라고 치켜세우는 사회지만 그럼에도 석연찮았다. 왜 사회 구조는 개인의 뛰어남과 특출남을 원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갉아먹으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 뛰어나기를 원하는가. 현대 사회는 모든 개개인이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다. 고도로 발달한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다는 눈속임 아래에 끝없는 단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간혹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죄악감과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타인에게 의존을 하고 싶은 순간에는 스스로 해야 한다며 나를 다그치게 만들고, 내가 독립적으로 스스로 꾸려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에는 누군가에 의존하며 살아가지 않는 내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다그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결국엔 마음의 불안함을 키우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9년 차 직장인, 팀장이라는 직급과 엇물려 여러 가지 부담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은 배가되고 있었다.
그때 '진정한 자립이 의존'이라는 문장의 발견은 내 부담을 물 흐르듯 씻겨 주었다. 오히려 의존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책은 주장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방향감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키를 잡고자 했던 내 행동에 다른 꼬리표를 붙이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런 마음에, '그런 이유 때문에'가 아니라 '인간이 자립을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말이었다.
지난 주말에 만난 친척 언니가 내 여러 고민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결국 정답은 다 네 안에 있어. 나도 옛날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막 물어보고 만나기도 하고, 답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결국엔 다 내 안에 있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게 가장 중요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아까 언니가 내게 물었던 질문을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가 아까 나한테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라고 물었던 거구나?" 그렇다. 이렇게 물어도 다시 나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안다. 어찌할 수 없는 충동으로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질문을 쏟아내도, 다시 '나'다. 그래도 이런 의존이 다시 '나'로 돌아가게 함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의존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