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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는 경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by 김채미


얼어붙은 저수지 표면에는 작은 눈송이들이 쌓여있었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산 너머에 걸려있던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고, 진한 주황빛 노을을 만들어냈다. 울긋불긋한 빛은 하얀 눈더미 아래에 내려앉아 작은 불씨를 피워냈고 하얬던 저수지 표면이 서서히 달아오르듯 붉어졌다. 나와 친척 언니는 전면이 통유리로 된 2층 카페에 앉아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말 이쁘다."

반짝이는 저수지 표면을 바라보고 있던 언니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뒤이어 내가 건넸던 질문에 천천히 답을 주었다.

"지금도 하고 싶으면 다 할 수 있어. 내 친구들 중에서도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유학 가려는 친구도 있고, 태국에서 몇 달 정착하며 사는 친구도 있어. 사실 지금 하려면 모든지 할 수 있지. 다만 얽매여서 결정을 내리지 못할 뿐이야.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그러니까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을 거야."

언니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모든 것이 나 자신과 싸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택과 의견을 모두 내 현실의 범주 안에 두기 위해, 통제하기 위해 우리는 자꾸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꺼내니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라는 수필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통제하는 것이다. 규칙과 법률이라는 틀로 계속해서 통제 가능한 범위에 모든 일을 두려고 하고, 이를 질서를 위한 것으로 여긴다."라고 적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질서와 평화를 위한 수단이 사회를 조이는 통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삶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상황과 개인을 통제하려고 한다. 내 손 아래에서 만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약속받지 못한 상황보다 약속받은 미래나 상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가. 이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집단에서, 사회에서 무언가를 컨트롤할 수 있고, 무언가를 논리 정연하고 질서 있게 컨트롤하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나도 오랜 세월 동안 집단에서 '현실적으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상황을 통제하며 살아왔다. 요즘 사회에서 이 능력은 생존을 위한 큰 무기가 되지만, 한편으로 '현실적으로'라는 말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결론적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지진이나 해일가 같은 재난을 예견할 수 없었으며, 12월 3일에 계엄이 선포될 것이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심지어 현재 각광받고 있는 AI기술이나 여러 테크놀로지적 결합이 우리 사회를 더 우월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조차 단순한 믿음으로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

"현대 과학을 대변하며 과학의 방법론적 접근이 종교적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옹호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과학자들에 의해 전해진 지식 역시 믿음과 신뢰에 기초하여 수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결론을 수용하는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과학이 그 자체의 차별적인 표식이자 우월성의 근간이라고 주장하는 실험 절하에 종속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금까지 과학 자체의 대안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무시했을 뿐 아니라 이에 태만하여 망각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권리를 가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대안적 자격에 대해 과학이 편협한 태도는 보이는 것은 과학이 결국 유일신교의 세속적인 확장임을 보여준다. 이는 신이 없는 유일신교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종교는 '비이성적', 과학은 '이성적'이라고 재단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장 맞닿아있다고 생각하는 과학도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믿음 아래 재건된다는 것이다. 기존에 현실이라고 믿었던 이론이 어느 날 비이성적인 이론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적으로'라는 말은 어쩌면 인간을 좁은 공간에 몰아두려는 족쇄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끊임없이 방안을 찾아 나서지만 결코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하루는 성실하게." 이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명심하는 목표라고 한다. 하루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허다하겠지만, 그럼에도 인생 전체보다는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내는 것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 아닐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주스를 홀짝이면서 깨뜨리고, 깨지는 문장을 하나 더 만들어냈다.


세 번째, 과학과 현실이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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