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02
연말에 잇달아 본 두 편의 영화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참사들이 죽음을 되새기게 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수많은 죽음 앞에서 우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주인공 마사는 암에 걸려 고통 속에서 삶을 보내다, 친한 친구에게 안락사를 유도하는 알약을 얻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한다. 반면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붙잡히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대에 오른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룸 넥스트 도어>의 마사도 암을 선택하지 않았고, <하얼빈> 속 안중근 의사도 국가를 위해 행동했을 뿐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 예고될 것을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행동을 선택한 것뿐이다.
두 영화에서 죽음의 문턱에 선 주인공들의 모습을 비추며 공통적으로 담은 장면이 있다. 바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침엽수림을 담은 장면이다. 두 영화를 거의 연달아 봤기에 정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다른 감독이, 죽음을 그리는 장면으로 똑같은 장면을 담을 수 있지? 하고.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서는 마사가 스스로 죽음을 유도하기 위해 묵은 숙소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마당에 놓인 썬베드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그때 고스란히 마사의 시선이 담긴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울창한 나무들. 꼿꼿하게 선 침엽수림들. 영화 <하얼빈>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고, 안중근의 얼굴에 극명한 조명을 쏜 다음 바로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침엽수림을 비춘다. 결국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일까. 아니면 마지막에 이르러서 인간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는 말일까.
줄리언 반스는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에서 암에 걸린 주인공 엘리자벤스 핀치를 통해 이런 말을 한다. "암은 중립적이에요.'라고. 여기서 암은 죽음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며, 이는 곧 "죽음은 중립적이에요.'라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죽음은 중립적이다. 선도 악도, 젊은이도 노인도, 국가도, 시간도 넘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공포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두려운 점이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작게 보인다.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모든 게 어린아이 소꿉놀이처럼 의미 없고 작위적인 세상으로 바뀌는 것 같다.
그래서 서글프다.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놓고 애써서 연결해 놓은 온갖 지식과 구조와 기반들이 수많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처럼 느껴지니까. 그럼에도 죽음 위에는 새로운 관계가, 세상이 태어난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는 마사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 곁을 지켰던 친구 잉그리드는 마사의 딸을 만나게 되고, <하얼빈>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행동했던 안중근 의사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오래 이름이 남게 되었다. 다시 구조와 제도가 재정비되고, 부조리가 뒤엎어지며, 보완된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라며, 세상은 그것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누워서 숲을 바라보는 건 죽음과 삶의 공존을 바라보는 일과 같을지도 모른다. 한 나무의 가지를 썩어 들어가고 메말라가지만, 또 다른 나무는 끊임없이 생장하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숲이라는 공간 안에서 공존하고 살아간다. 그게 생이기에, 감독들은 죽음을 다루는 영화 안에 필연적으로 누워서 숲을 바라보는 장면을 촬영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