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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 현실주의자

2025.01.03

by 김채미


어젯밤 와인을 홀짝이던 와중에 사주 이야기가 나왔다. J님이 삶에서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는지, 그 굴레라는 게 있는지 궁금해서 공부하게 되었다며 우리를 한 명씩 봐주었는데, J의 말처럼 사주는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J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 알았냐고, 거기에 그런 게 나와 있냐고 알 수 없는 용어들로 적힌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수백 년 전 만들어진 통계학이 지금까지 얼추 맞을 수가 있냐며 몇몇은 한탄했다.


내가 J님의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Y님이 "그런데, 네 말이 아니더라도 딱 보면 알지 않아? 얼굴에 다 보여요. 저는 첫날에 저를 붙잡으셨을 때부터 그런 성격이실 줄 알았어요."라고 했다. "저는 다 숨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보여요?"라고 되묻자 "그럼요, 다 보여요."라고 Y님이 웃었다. "정말 징그럽죠. 저는 제가 공부하면 할수록 이게 징그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동시에 아,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구나, 하고 나를 판단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냥 내가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요."


J님은 뒤이어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게 내 모양이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 것이라는 걸 알아도 그걸 바꿀 수 없죠. 그냥 그렇구나, 이렇게 될 거구나 하고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징그러워요."라고 덧붙였다. "그게 덤덤해지는 과정인가 봐요. 반복될 거라는 걸 알잖아요. 그리고 이미 수많은, 내가 겪었던 일들이 다른 모양으로 반복되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어찌 보면 능숙해지고,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전 좀 담담해지더라고요." 나는 J님 말에 이렇게 답하며 얼마 전 책에서 보았던 '로맨틱한 비관주의자'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는 굳이 말하자면 '로맨틱한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로맨틱한 현실주의자'지. 비관은 미래에 희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암울하게 현실을 진단한다. 하지만 난 진단보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그치고 그렇다면 더 나아지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 모색하는 걸 선택한다. 섣부르게 진단하기보다 방법을 찾고, 아무리 비관적일지라도 낙관을 품어보고서 한 발자국 더 나아보고자 행동한다.


사주를 들으며 역시 나는 '로맨틱한 현실주의자', '이상을 놓지 못하는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주라는 통계가 말하는 '나'에 소름 끼쳐하면서도 그것 또한 정보의 하나일 뿐이라고, 나를 나타내는 무수히 많은 카테고리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 정보를 얻었으니 그걸 어떻게 이용하고 다뤄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나를 보며 또 소름 끼쳤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란 걸 매번 반복적으로 적고 있으니. 앎이라는 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국 반복적으로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되새기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앎은 내 가치관과 방향성에서 해석되고 반복되고 재현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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