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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Aug 24. 2019

[사진 이야기] “The remains of 2017"

잊히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록


2017년 노벨문학상은 일본 출신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의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지난 일 년간 구상했던 사진 작품과 비슷한 점들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소비한 것들 중 남겨지는 것과 버려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어제 공포스러운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 내가 무심하게 사용했던 플라스틱 페트병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도 넘쳐나서 하늘을 날아 도시를 습격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아니, 벌써  진행 중인 일이다. 우리는 매일 너무 무절제한 소비를 하고 있다. 습관적이고 일회적인 만족을 위해 소비된 수많은 상품들이 찰나의 순간 우리를 만족시키고 빠르게 벼려지고 만다. 


점심 식사 후 습관적으로 마시는 아이스커피의 플라스틱 빨대와 일회용 커피잔은 불과 십여분 내 손에 들려있다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슈퍼마켓에서 생선을 구매하면 이중 삼중 포장을 해서 비린내를 완전 차단해 내 손에 건네 진다. 언제부턴가 양말은 엄지발가락에 조그만 구멍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기물로 전락한다. 공장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며 생산물들을 쏟아내고 있고 날마다 쓰레기산이 하나씩 생겨나고 있다. 현대인은 이른바 엄청난 소비와 폐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득 나를 잠시 기쁘게 하고 총알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 졌다. 그들과의 소멸을 잠시 보류시키고 백 년 정도 붙잡아두고 싶어 졌다. 사진의 내구성을 고려해보니 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면 되겠다 싶었다.


나의 무절제한 소비생활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출근하는 와이프의 손에 들려주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세계 각국에서 배를 타고 먼길을 온 원두를 갈아내 존경하는 박이추 선생을 따라잡으려는 듯 정성스럽게 드립을 한다. 아침 식사 후에는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진 치약을  칫솔에 두툼하게 묻혀 한껏 거품을 내어 양치를 한다. 그리고는 서랍을 열어서 어느 양말을 신고 출근하면 더 기분 좋은 하루가 될지를 잠시 생각한다. 거의 모든 주말 저녁에는 맥주캔 또는 와인병과 와인 코르크를 가치 있는 것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회사에서는 수많은 서류들을 만들어내고 오류가 있거나 한번 읽은 것들은 잔뜩 구겨서 폐기시키면서 가득 쌓인 쓰레기통이 마치 업무의 성과의 지표인 양 일과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소비되고 소멸되어지는 것들이 나에게 준 감흥을 표현할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로버트 파커의 <The Greatest Wine> 이란 책의 “Wine expression”에 나타나 있는 와인을 표현하는 형용사들은 와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도 손색이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아침에 새로 산 외투와 맞춰 신었던 '거만한(arrogant)' 양말, 성공적으로 업무를 끝내고 마셨던 '위풍당당한(majestic)' 커피, 어느 비 오는 날 마셨던 '풀이 죽어있는(flabby)' 와인, 오랜 기다림 끝에 승인을 득한 '생기발랄한(exuberant)' 결재 서류. 내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것들을 표현해줄 적절한 언어와 분절되어 있다. 그 행위에 묻어 있던 물질들 또한 이러한 언어와 단절되어 있다. 지나치게 표준화되고 박제된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현대의 도시생활을 이렇게 다채로운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다면 감성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짝짓기 놀이를 하고 싶어 졌다. 하지만 이미지를 우리의 기대범위 안에 있는 텍스트와 연결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감흥이 떨어질뿐더러 불일치와 우연의 연속인 우리 삶과 맞닿아있지 않다. 십수 년 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생중계하던 카메라에 우연히 잡힌 북한의 사탕에 표기되어있는 “사탕”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밋밋함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천연 과일향이라거나 초콜릿 맛을 연상시키는 우리네 사탕의 이름과는 우주만큼 거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갖고 있을 수 있는 사탕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개념과 상상을 단 한 번에 제압하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단어였다. 카레에는 '오뚜기'가 아닌 '카레'라고만 표기되어 있을 테고 커피에는 '맥심 '대신 그냥 '커피'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 상상력이 사라진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담배 파이프 그림에 적힌 “This is not a pipe”와 같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살짝 비틀어보고 싶었다. 텍스트들을 이미지에 의미 없이 던져 보았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도 어딘가 조금씩 살짝 비틀어져 있거나 혹은 전면적으로 뒤틀려 있지 않은가?


The remains of 2017-Coffee, 72.5x109cm, digital inkjet pigment, 2018


The remains of 2017-Toothpastes, 60x60cm, digital inkjet pigment, 2018



The remains of 2017-Corks, 60x60cm, digital inkjet pigment, 2018



The remains of 2017-Socks, 60x60cm, digital inkjet pigment, 2018



The remains of 2017-Papers, 60x60cm, digital inkjet pigmen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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