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바르셀로나이고 나는 어젯밤 택시를 두 번 타는 우여곡절을 겪고 9시쯤 예약한 아파트에 도착했고 11시에 잠들었다. 한국시간으로 풀이하자면 일요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월요일 새벽 6시까지 24 시간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침대에 몸을 누인 셈인데 야속하게도 4시간 죽은 듯이 자고 눈이 떠졌다. 규칙적인 리듬으로 살고 있는 나의 에너지의 흐름이 한국 시간 오전 11시에 해가 중천에 떴으니 나에게 '늦잠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에너지의 흐름은 단기간에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다.
심리학자 융은 정신 에너지의 흐름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을 보여준다.
'편안한 집에서 살면서 맘껏 잠자고, 식탁에 놓인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고, 발정기에 왕성한 성적 활동을 하는 애완견처럼, 순전히 자연 상태에 사는 인간은 육체적 본능과 욕망만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화를 창조했고 노동을 전문화했다. 이것은 에너지가 흐르는 자연적인 경사도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이제 인위적 통로로 보내는 능력을 전제한다.'
인간의 확장성과 적응력은 너무나 대단해서 자연적인 흐름과 경사도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인위적인 통로로 보내는 천재들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광기 어린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감상한 적이 있다면 이에 동의하지 않을까?
회사에 수두룩하게 깔린 영업 천재들은 또 어떠한가? 예전 회사 C 사장님은 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오로지 영업만 해오신 분이셨다. 회사 내에서 돌아가는 여러 가지 일들 중 숫자에 대한 기억은 그분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몇 주 전에 보고한 보잘것없는 매출 예상 금액도 조금만 달라지면 금방 눈치를 채서 본부장들이 쩔쩔매곤 했다. 재미있는 일은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동안 영업회의가 있었는데 그 누구도 그보다 한국을 포함한 미국과 중국의 금, 은, 동메달 획득 숫자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이러게 숫자에 빈틈없는 그의 성격은 자아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른바 페르소나일까? 이는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수십 년 전 영업사원 첫날부터 숫자를 기억하는 역량이 그의 생존에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그의 페르소나에 숫자에 대한 강박적인 기억을 강화했으리라 믿어진다. 페르소나는 자아와는 조금 다른 나의 모습이다 융은 '페르소나는 자아와 세게 사이에 있는 정신의 외피'라고 말했다. 페르소나는 '실제적 인물이 아닌 드러난 인물이며 특별한 목적을 위해 채택된 심리학적, 사회적 구성물'이다.
자아와 페르소나가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것은 외교장관들의 업무방식이다. 몇 달 전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 회담에서 그들은 그들의 페르소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들의 회담에서 그들의 진정한 자아는 꽁꽁 숨기고 행동하였다. 그들은 자국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우가 연기하듯이 그대로 표출했다.
비행기에서 융의 책을 읽다가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여성 아티스트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고, 총 2억 장의 음반 판매고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10명의 가수들(1등은 비틀즈) 중 한 명이다. 'Can I Be Me'라는 제목이 읽고 있던 책과 연결되었다. 나는 나의 모습대로 살 수 있는가? 우리들의 수많은 고민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2 년 2 월 11 일 휘트니 휴스턴의 죽음을 출발점으로 하여 휴스턴의 역사와 그녀의 가족 및 친구들과의 정서적 관계에 대해 보여주었다.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그녀는 어머니보다 더 의지하던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받았다. 음악기획사 사장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계약 위반이라고 고소하고 1억 달러에 이르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Bobby Brown)과의 이혼까지 겪으면서 자아가 계속 무너져 갔고 마약으로부터도 헤어나지 못했다
가장 빛나는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페르소나, 자아, 그리고 리비도에 대해 생각했다. 힘든 시련을 겪을 때 나의 가면인 페르소나가 벗겨지고, 자아와 나를 이끄는 에너지 리비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가 꼭 특정한 무늬의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사회적 요구로 나에게 덧씌워진 페르소나가 아닐까? 나의 본질적인 자아는 무엇일까?
사과껍질 같은 외피에 불과한 페르소나에 조그만 스크레치라도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너무 벌벌 떨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