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고 간간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예전(한 삼십 년 전쯤?)에는 연말에 거리를 걷다 보면 레코드판 매점이나 상점에서 틀어놓은 캐럴이 거리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80년대에는 한곡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한 두 달 동안은 거리에 그 노래만 흘러나왔다. 그 당시 가요 톱 10에 특별한 규칙이 하나 생겨났는데 바로 '골든컵'제도다. 조용필 노래 '못 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 1위 (1982년 8월 18일부터 11월 3일까지)를 하자 도입된 제도이다. 5주 연속으로 1위에 랭크되면 1위 트로피 외에 '골든컵'이라는 특별 트로피를 수여하고 난 후에 더 이상 순위 집계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가온 디지털 차트에 의하면, 2019년 47주가 지난 현재 28곡의 1위 곡이 있었다. 가장 오랫동안 1위 곡을 지킨 경우는 4주로 악동뮤지션의 곡이다. 1위 유지기간이 평균 1.6주로 고작 열흘밖에 안되었다.
유행가가 세상을 호령하는 기간만 단축된 것이 아니다. 단일 기술이 세상을 평정하는 시간도 짧아지고 있다. 2016년 3월에 이세돌을 이겨 세상을 놀라게 한 인공지능 알파고 리(Alphago Lee)는 1년 후인 2017년 4월 커제를 눈물짓게 만든 업그레이드 버전 알파고 마스터((Alphago Master)에게 최강의 자리를 내주었다. 2018년 12월에는 더 이상 인간이 강화 학습을 시키지 않아도 되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알파고 제로(Alphago Zero)가 나타나 역대 최강임을 알렸다.
며칠 전 접한 이세돌 기사의 은퇴 이유 중 하나가 인공지능이라는 벽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은퇴 기념 대국 상대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정부의 장관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듯이 서비스와 제품 그리고 지식의 유효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세상 모든 아이돌 스타를 꿰고 있던 대학생 딸아이는 이제는 모르는 가수가 너무 많다고 실토를 한다. 너무 많은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조용히 무대 뒤에서 사라져 간다.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의 설치 가이드를 읽고 있는데 서문이 이렇게 시작한다. 아마 다른 프로그램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xx 년 x월에 개발되었다. 연구실에서 a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후 이름이 현재로 변하였다. 대중에게 처음 release 된 제품 A 1.0은 지난 3월에는 2.0으로 더욱 풍부한 기능을 탑재하여 업그레이드되었다" (나의 업그레이드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엔씨소프트의 효자 상품 리니지 M이 2017년 출시 이후 줄곳 지켜오던 게임 매출 황제의 자리를 2019년 10월에 출시된 자사 제품 리니지 2M에게 내주었다. 우리는 영원한 패권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160년 전에 쓰인 죤 스튜어트 밀이 저술한 ‘자유론’이 현대인의 불안한 초상에 대해 예견하는 내용이나 80년 전에 에리히 프롬이 현대인의 무기력에 대해 분석한 글들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유효기간이 느껴지지 않는 인문학 고전들에 대해 조금 더 탐구해보고 싶은 이유이다.
문학만이 고전은 아니다. 300년이 다 되어가도록 사랑받는 헨델의 메시아, 우렁찬 축복을 받는 듯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은 연말 클래식 공연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원로가수 정미조의 개여울 이란 곡은 빼어난 가사의 덕도 있지만 나에게는 클래식이나 다름없는 명곡이다. 오래 묵어도 빛나는 맛을 선사하는 묵은지 같은 음악 그리고 고전문학과 함께 하고픈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