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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go Jul 29. 2020

욱~해서 과거를 지우다.

정 들었던 DVD 폐기 소동


회사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던 30대 중반에 월급이 줄줄 새어나가는 구멍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하이파이 오디오 생활이었다. 가장 저렴한 탄노이 스피커와 인켈 CDP(TEMA), 그리고 허접한 인티 엠프를 좁은 아파트에 들여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클래식 CD를 사러 명동까지 가서는 메고 간 배낭을 꽉 채울 정도로 사 오곤 했다. 첫 배낭에 실려온 엘비스 프레슬리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정경화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은 아직도 나의 애청곡이다. (물론 클래식에 눈뜨기 전이라 한번만 듣고 잊혀진 것들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듣다가 괜히 쓸데없는데 지 예민해져서 비디오의 화질을 논하고 음질을 따지다 보니 자연스레 DVD를 소장하게 되었다. 해외 출장에 반드시 짬을 내어 음반과 함께 DVD 타이틀들을 잔뜩 사들고 들어오곤 했다. 영화나 음악 DVD 모두 맘 놓고 고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출시되지 않았기에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어도 한국에 없는 레이블은 구입을 하는 편이었다.


아이와 함께 '쿠스코 쿠스코', '뮬란'을 보면서 스토리보다는 말발굽 소리 나 빗물 소리의 리얼함을 즐겼다고나 할까.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멜로디보다는 소리에 심취해 있었던 것 같다. 슬라브 행진곡을 들으며 무릎에 파르르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저음을 경험하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이글즈의 Hell Freezes Over 음반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들으며 탄력이 느껴지는 킥 드럼 소리를 얻기 위해 무거운 파워엠프를 수도 없이 들었다 놓았다.


(아!~ 그런데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새네요)  HD도 아닌 SD급 화질인 DVD를 점차 안 보게 되어 DVD 플레이어는 멀쩡한 것을 갖다 버린 지 오래됐는데, DVD 타이틀들은 CD장의 가장 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은지 또 어언 십 년... 지난 일요일에 좁은 집구석에 답답해하다가 홧김에 다 분해해서 버렸다.


내 나이가 얼마나 더 먹어야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젊은 시절 듣던 레이블들을 하나씩 회상하며 영화나 음악을 들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넷플릭스의 노예가 되어 UHD 또는 그보다 더 짱짱한 화질로 최신영화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잘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비싼 강남땅의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빈 공간을 늘리는 방법은 책을 이나 사물을 버리는 거 말고는 할 게 없다.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전곡, 베르디 오페라 전곡, 투란도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전편, 사이먼 앤 가펑클, 마이클 잭슨을 스트리밍 해주는 곳은 없지만 그냥 일단 해체해 버렸다. 플라스틱과 비닐과 종이와 CD로 하나씩 분해해서 구시대 디지털 문화의 화석과 같았던 지나간 20년을 버렸다. 스트리밍이 월정액만 내면 무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클래식 전문 스트리밍 앱인 Idagio를 구독하면서 더 이상  CD를 구입하지 않게 되었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눈이 UHD에 기준을 맞추어 버렸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내 첫 오디오 였던 인켈 '테마'. 오디오는 부품의 합 + 노하우라는 사실을 인켈에게 알려준 실패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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