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고딕지구, 2019.11]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면 조수석이 좋을까 아니면 운전대를 잡는게 좋을까? 당신은 무엇을 택하겠는가? 어느 편이 더 힘들고 어느편이 우리를 따분하고 지치게 만들까?
내 경험을 돌이켜보면, 아무 생각 없이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 편할 것 같지만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진다. 심지어 소화가 안되고 멀미까지 하기도 한다. 반대로 운전대를 잡고 내가 원하는 길을 찾아 나가면 힘은 더 들지만 내 안에 더 큰 에너지가 생겨나서 나를 지탱해 준다.
무기력증이 조금씩 피어올라 내 영혼을 살살 흔들어 대기 시작할 무렵 공교롭게도 글쓰기 수업 과제가 '무기력'이다.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라는 책을 읽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차의 뒷자리에서, 컴퓨터 모니터 옆에서, 배낭의 안쪽 한자리에서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이 책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시간이 그냥 흘러갔다.
'그래 딱 한 페이지만 읽자'라고 책을 펼쳐 드니 의외로 술술 잘 나간다. 권여선의 소설만큼 미끄러지듯이 쏙쏙 들어오지는 않지만 말이다. 한 페이지를 읽는 것과 바라만 보는 것이 무기력의 경계선이었으리라.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1937년에 쓴 '무력감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몇몇 다른 글 들을 모아 엮어 놓은 책이다. 그 시대에 그가 바라본 현대인의 무력감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가 말하는 '진짜 삶'에 대한 인사이트 중 무기력증에 대해 살펴보자.
이 책은 무기력증을 겪는 사람들의 몇 가지 증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내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키칠 수 없으리라 확신한다. 자꾸만 깊은 열등감이 베어 나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DNA에서 발현된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나의 용모, 키, 지능 등 변하지 않는 것들에 의존하기만 할 뿐 외부 세계에 영향을 주어 무언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능이 이 정도뿐이라서 좋은 대학에 갈 수가 없어."
"남자 중에서 키가 너무 작고 허약해서 난 절대 리더 역할을 할 수 없어"
"타고난 지구력이 형편 없어서 시험공부에 집중할 수 없고 결국 나쁜 학점을 받게 될 거야"
또한 이들은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를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심리적인 원인에서 기인한 무력감을 신체적인 통증이나 건강 탓으로 돌리려 한다. 때로는 애꿎은 사물에서 무력감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
"내가 그날 새벽잠만 설치지 않았으면 그렇게 형편없는 골프 스코어를 기록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비염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든 탓에 그만 너에게 그렇게 화가 폭발한 것 같아"
"소리가 엉망이라서 그래. 오디오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면 훨씬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에 부모의 강요에 의해 유명 의대에 합격한 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단지 부모가 원한 것일 뿐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진정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어머니, 아버지, 아내,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아니다. 이렇게 남에게 운전대를 맡기면 결국은 무기력증이란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나는 엄마가 화를 내지 않게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을 뿐이야.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어"
"지난 5년간 늦게 퇴근하면 아내가 싫어해서 무리하게 칼퇴근을 했었어. 그래서 저성과자가 된 것 같아"
무기력증의 정반대에 서 있는 한 친구가 생각이 난다. 그는 본사에서 한국을 방문한 고위직에게 브리핑을 준비하느라 한 숨도 못 자고 자료를 준비해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날 저녁에는 나를 비롯한 업계 관계자와 약속한 저녁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광화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온다는 것이 그만 반대편 방향 열차를 타고 깜박 잠이 들어 허겁지겁 한 시간이나 늦어 모임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저녁 미팅에서도 유쾌하게 열과 성을 다했다. 나는 그날 그의 모습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강한 집중력으로 성과를 만들고 약속을 지키는 강건한(robust)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글쓰기에서 만난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스타일이다. 학창 시절에 해외에 있는 여성리더를 에게 이메일을 수백 통을 보내서 그들의 성공 비결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급기야는 미국으로 건너가 수십 명의 유명인사와 인터뷰를 하였고 그 내용을 브런치에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세상의 다양한 트렌드에 대한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어렴풋한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이 내가 만난 이들 중에는 거의 최상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만든 지도를 들고 인생의 운전대를 움켜잡고 열심히 달리고 있다. 때가 되면 차량을 정비하고 업그레이드하고 연료통을 가득 채워가며 선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뜻밖의 좋은 일이 생겨 누군가 그들의 차를 최고급 차량으로 교체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잠시의 피곤도 자신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도 그들의 가는 길을 막거나 늦추지 못한다. 이들에게 무기력이 자리 잡을 틈이 없다.
남 탓을 하며 무기력하게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나의 길을 가자. 나만의 템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