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것처럼 기대 속에 맞이한 성탄 전야는 역시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다.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싱싱한 보졸레 누보와 함께 먹으며 라디오를 들었다. 햇포도주의 달달한 과일향이 클래식 선율에 실려 행복감으로 발효되어 들어왔다.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을 청하기에는 아직 설레는 가슴이 남아 있어 클래식 관련 유튜브 방송을 보았다.
음대생이 클래식 거장들을 초청해 원포인트 레슨을 받는 내용인데 얼마 전부터 관심있게 보고 있다. 월클 피아니스트 서혜경, 임동혁 등이 음대생에게 원포인트 개인 레슨을 해주는 장면,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의 연습하는 모습을 담아낸 내용을 다시 시청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먼길을 떠나서 본인 최고의 모습을 찾은 이들과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음대생의 만남은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그들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탁월성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은 영화배우 같은 미모의 연주자인데, 두 살 때부터 영국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각종 대회에 입상을 하고 15세에 최연소로 비아니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한국인 최초로 2위 입상하였다. 정명훈으로부터 하늘이 내린 재능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정경화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후원자로부터 1666년 산 스트라디 바리우스를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지원을 받고 있다.
그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천재적인 감성표현의 대가가 된 것은 물론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을 더한 결과일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시작했으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5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응원에 힘을 받아 바이올린을 다시 잡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와도 같은 일이다. 비록 그녀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지만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힘든 음악공부에 매진했다.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법칙' 중 3번째 주제는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과 만나라'이다. 작가는 자신이 자라난 캐나다 외딴곳의 작은 마을 페어뷰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낮에도 영하 40도인 긴 겨울에 마을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공학자 기질을 타고난 크리스란 친구, 타고난 유머감각을 가진 매력적인 에드는 모두 고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였다. 결국 그들은 대마초에 취해 살다가 정실질환을 앓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다.
'크리스와 에드는 왜 고향을 떠나지 못했을까? 고향을 떠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꼬리에 깡통을 메달고 뛰는 개처럼 과거의 흔적이 족쇄처럼 따라다닌다. 과거의 굴레를 떨쳐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 자꾸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까? 그냥 더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가장 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추락은 상승보다 훨씬 빠르고 쉽다.'
이에 반해 작가 조던 피터슨은 낡은 틀을 박차고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다.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도시로 나갔고 그곳에서 백사장의 모레 한 줌에 불과했던 자기 자신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혼돈 속에서 항상 새로운 가능성이 꿈틀 거린다.'
꽃길만 걸은 것 같아 보이는 한수진은 실상 왼쪽 귀가 안 들리는 유전병을 갖고 태어났다. 고질적인 턱관절염 때문에 수술을 받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에 3년 이상 악기를 손에서 놓아야 했고 5년 이상의 공백기를 가졌다. 그녀는 이 시기에 정신적인 고통과 초조함이 있었으나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삶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그녀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청중들에게 그리고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제공한 후원자에게 불굴의 노력으로 최고의 모습을 선사했다.
나는 30년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낮선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학교 수업도 듣고 해보지 않았던 도시 프로젝트에 온 몸을 던져 일하고 있다. 조던 피터슨처럼, 한수진처럼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떠나 또 다시 최고의 나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지도교수님은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친구처럼 나에게 최고의 모습을 바라는 기대를 내비친다. 힘들지만 몸에 좋은 약을 주시는 주위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나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들 곁에 있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맥 빠진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주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내 모습을 찾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게 된다. 그들은 내가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함께 나에게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