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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이슬 Jan 26. 2023

1인가구 가장 되기

자, 이제 시작이야!


첫 자취의 기쁨에 들떠 아무 생각 없이 백수 주제에 소주맥주와인양주를 들이붓다

파산을 걱정하던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한겨울 메마르고 쩍쩍 갈라지는 입술마냥 급격하게 말라가는 통장 잔고를 바라보고 있자니,

얼른 다시 멋진 작가님들과 예쁜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순수한 욕구가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파주로 튀기 전에 이력서는 업데이트를 다 해둬서, 지원하는 회사에 따라 아주 살짝씩만 손보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대부분 출판사마다 자체 지원서가 있어 질문지가 조금씩 달랐거든요.


가령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된 도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의 장점과 단점을 서술하시오'와 같은 문항에는 "귀사에서 출간된 <소맥의 기쁨과 슬픔>은 저자의 깊은 알코올 내공과 구체적인 주정 사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소맥에는 '슬픔'이라는 키워드가 어울리지 않는 고로, 애주가들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어쩌고 저쩌고.

'네까짓 게 우리 출판사에 왜 어울린다고 생각하니?'와 같은 문항에는 "귀사에서 추구하는 인재상은 능동적인 창의융합인재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년간 단련된 알코올 융합 능력으로, 술자리에서 능동적으로 소맥이나 막사, 연맥 등을 창의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기에 귀사와 어울리는 인재..."와 같은 식으로요.

(물론 진짜 이렇게 쓰면 서류 광탈입니다...)


다행히 파주에는 출판사가 아주아주 많았고, 시기도 아주아주 잘 맞았는지(봄이라, 설 상여를 수령한 후 다들 돔황치는 시기쯤...) 구인 공고가 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 중 하나는 붙겠지' 싶을 정도로 이력서를 꽤 많이 넣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파산할 일은 없겠다 싶어 맘 놓고 술을 이어 먹은 후, 바로 다음 날부터 울리는 전화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일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누가 봐도 술에 쩐, 갈라진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북이슬 씨 되시죠? 여기는 OO 출판사..."


네, 그렇습니다. 뭐가 그리들 바쁘셨는지 바로 다음 날부터 지옥의 면접 레이스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 북이슬 능력자였잖아?!'라고 오해하실 수 있어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원래 출판계에는 5-7년 차 대리급 실무진이 굉장히 귀합니다. 대부분 이쯤 때려치우고 다른 업계로 튀거나, 1~2번의 이직 후 정착해 한창 커리어를 쌓을 연차라서요.)


지옥 체험 1.

작은 규모도 아니었는데, 문자로 면접 시간을 통보하던 출판사가 있었습니다.

더 특이한 건, 면접 하루 전날 면접날짜 변경 통보를 또 문자로 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째 변경 통보 문자엔 아주 정중하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곳에 취업하게 되어 면접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너 같으면 가겠냐 이 새X야XXXXX)]


지옥 체험 2.

아주 작은 규모거나 특이한 케이스(지인 추천이나 낙하산 등)가 아니라면, 보통 출판사의 면접 절차는 3번 정도 됩니다. 서류 통과하면 근무하게 될 팀장(과 팀원) 면접, 여기서도 ok 되었다면 실무 테스트(보도자료나 기획안 작성, 교정교열 및 윤문 테스트 등등), 여기도 통과했다면 드디어 임원이나 대표 면접.


한번은 11시쯤 시작해 실무진 면접과 실무 테스트를 끝내고 임원 면접까지 올라가자 거의 12시가 다 된 적이 있습니다. 네, 점심시간이죠.

임원실에 들어가자, 배고프지 않냐고 다짜고짜 점심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하더라구요.

여기까진 뭐... ok.

근데 삼겹살집(!)을 가더니 소주를(?!) 시키는 겁니다.

"이슬 씨는 술은 좀 하나?"

"아... 제가 잘 못 마시기도 하고, 오늘은 차를 가져와서요."

"에잉... 술을 한잔해야 속 모습을 보는 건데..."


오 지저스. 어메이징 코리아... 제 속 모습을 그쪽이 왜 봅니까...^^

업무 능력이랑 사회적 페르소나만 보시면 되지...%$&%$%&@@#@#@


지옥 체험 3.

"북이슬 씨 되시죠? OO 출판사입니다. 혹시 이번 주말에 면접이 가능하실까요?"

"(대표님이 엄청 바쁘신가 보다...) 아, 대표님이 주말밖에 시간이 안 되시는 걸까요?"

"1차 면접은 근무하게 되실 팀의 팀장님 면접입니다."


오... 이 출판사는 주말 근무가 당연한가 보다! 너무 신난다!


"제가 이번 주말엔 약속이 있어서요. 다음 면접은 안 잡아주셔도 괜찮습니다.^^"




수많은 지옥 체험 끝에, 그나마 상식적이다 싶은 곳으로 출근 날짜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력서를 넣기 시작한 지 한 2주 후쯤의 일입니다.

그동안 지옥 체험 덕분에 원룸엔 소주병이 아주 조금 늘어났고,

통장 잔고는 그사이 조금 더 줄어들었지만 파산 걱정은 덜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1인가구의 가장으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계기였답니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이제 진짜 돈도 벌어오는 가장이 되었으니 템포를 좀 올려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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