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감정은 매우 고약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사정없이 뭉개버리고 삶의 의미를 앗아간다. 이게 뭐지? 모든 게 허망하고 공허하다. 부지런히 일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명예를 얻고, 학문적 업적을 쌓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따위가 갑자기 무의미하다. 마음이 텅 빈 허무함 그 자체다. 이 감정은 혼자 떨어진 ‘나’가 사람을 그리워하는 외로움과 다르다. 공허함은 삶 전부를 무기력하게 하고 생기를 잃어버리게 한다.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는 감정이다.
어린아이는 인간 자체 본질이다. 그들은 아무런 결핍을 인지하지 않는다. 욕심도 없고, 공허하지도 않다. 아이는 자라면서 4~5살이 되면 자의식이 생긴다. 점점 더 성장하면서 바깥 세계와 접촉하여, 자의식이 성장하고 각각 나름 정체성을 갖는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사회윤리 규범과 자신의 정신세계를 접속한다. 그렇게 인간은 저마다 고유의 자아를 만든다. 자아는 단일한 하나 실체가 아니라 복합적 요소로 구성된다. 현재의 나는 그동안 경험을 통해 형성된 기억과 순간마다 지각하는 감각을 합하여 나라는 존재를 이룬다. ‘나’라는 자아는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경험의 복합체와 감정의 연합체로 이루어진다. (〈지혜의 빛 : 인문학의 숲〉. 유튜브)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그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가 성장할 때, 이미 너무나 많은 사회적 관념을 학습한 상태이고, 그 사회적 관념 상태는 굉장히 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권위주의 시스템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불공정에 쉽게 눈을 감아버린다. 반항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 입맛에 맞게, 특히 권력자 입맛에 맞게 어렸을 때부터 잘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지금 있는 ‘나’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긍정하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며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니체는 오히려 우리의 추한 면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현재 조건을 극복하려면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 나의 한계로부터 회피하지 않으려면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처한 조건을 순수하게 긍정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안주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나 자신이 행동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은 그동안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내적 가치관에 얽매인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어떤 사회도덕규범을 지키는지 등 정신세계 관념에 지배당한다. 이 관념은 바깥 사회에서 실현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충동이 일어난다. 사회에서 개인 욕망과 현실은 늘 간격이 있게 마련이다. 이 간격은 차이를 만들고 그 간격 크기만큼 결핍이 생긴다. 이 결핍의 크기가 클수록 공허함이 크진다.
다양한 경험과 지혜로 켜켜이 쌓인 내 생각, 그 생각을 상수로 고정시키고 바깥세상에서 행동하는 노동을 우리는 변수로 놓는다. 그러니까 내 관념인 생각은 바꾸지 않고, 오로지 내가 가진 생각 관념에 맞추려고 현실에서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면 결핍의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평생 그 결핍의 고통에 벗어날 수 없으며 공허함이 줄어들지 않는다. 하여, 내 관념을 고정 값 상수가 아닌 변수로 두어야 한다. 똑같은 일을 행하더라도 생각을 바꾸면 훨씬 더 결핍의 간격은 좁혀진다. 공허함의 크기도 줄어든다.사회 환경에 따라,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내가 만든 생각 관념은 갈대처럼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 수월치는 않지만 너저분한 집안 청소하듯이 꾸준히 생각 관념을 비우고 버리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면 현실과 생각의 결핍 간극은 점점 줄어든다. 그 좁혀진 간극만큼 공허함이 찾아오는 횟수도 줄어든다.
TV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서 JYP 엔터테인먼트 창립자이자 가수인 박진영이 공허감을 극복한 사례이다.
“I want to be (sucessful). 성공, 성공하고 싶었어요. 근데 그걸 다 이뤘어요. 모두가 손뼉을 칠 만큼 완벽하게. 근데 어느 날, 어디 마음 한 군데가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했어요? 이거 뭐지? 꿈을 이루었으니까 꽉 차야 하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먼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찾아보고 못 찾으면 그냥 살지 뭐! 아무튼 찾아보기는 했어요. 그것 말고는 희망이 없었으니까. 갖은 고민 끝에 ‘성공’이란 낱말을 ‘존중’으로 바꾸었어요. I want to be (respected). 왜냐하면 우리가 남의 책을 어떻게 하면 읽을까요? 가장 성공하고, 톱스타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그 사람 책을 읽고 싶나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누군가의 책을 읽으려면 그 사람이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나는 저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자 했어요. 성공과 존경은 달라요. 결과만 좋으면 ‘성공’ 이예요. ‘존경’은 과정도 좋아야 해요. 편법하고 불법하게 반칙해서 성공했다면 그것도 ‘성공’이지만 ‘존경’은 하지 않아요. 성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삶이 남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해요. 이런 생각으로 행동했어요. 그 후에는 저는 쓸쓸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았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나 이것 왜 해야지 하면서 무너지던 게 드디어 멈추었어요. 허전하고 공허한 마음이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제가 찾은 정답은 모든 사람의 정답이 아니에요. 저한테만 맞는 답이었어요. 한 명 한 명이 각자 자신에 맞는 답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음표? 질문을 던지는 게 시작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