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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깨 Mar 26. 2023

스필버그가 스필버그를 탐구해 보기로 합니다 “파벨만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Fabelmans)”에서 감독은 자신의 유년기를 비춘다. 스필버그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곧 영화 역사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 떨쳐낸 채 스크린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그런 면에서 모두가 아는 거장이 가려져 있던 자기 연대기가 탄생한 과정을 직접 고백한 이 영화에는 감격할만한 포인트들이 많다. 영화 속에 묘사된 스필버그의 어린 시절을 대리하는 인물 새미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처음 보는 장면을, 장난감 기차를 충돌시켜 카메라에 담아낸 그의 첫 번째 촬영 경험을, 보이 스카우트 친구들을 출연시킨 전쟁 영화를 상영한 후의 환희를 마주한 관객들이 느낄 즐거움이 상당하다. 꼭 시네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것은 부모의 연애담을 그들에게서 직접 듣는 것과 같은 종류의 스릴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한 해가 멀다 하고 프로듀서와 연출가로서 왕성히 창작해내고 있다. 스필버그의 작품을 모두 팔로업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 년간 보아 온 그의 작품에는 공통의 맥이 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지난 몇 년간 그는 인물을 탐구하는 일에 매료되어 있다. 그의 인물 탐구는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하며, 주로 자기 위치에 충실히 복무한 자들이 발하는 빛을 스크린에 담는다. 2013년작 “링컨”에는 자신이 내린 결단에 영향을 받을 개인들을 상상할 줄 아는 지도자만 느낄 고통이 담겨 있다. “스파이브릿지(2015)”에서는 만일 실패할 경우 개인으로서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 뻔한 협상에 뛰어든 변호사가 유능함과 인류애를 두루 갖추었을 때 얼마나 존엄해지는지를 보여준다. “더 포스트(2018)”에는 자신이 소유한 거대 자본의 이익 대신 공익에 충실한 보도를 결행할 때 가장 고결해지는 한 언론 자본가가 그려진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이 위치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사람들만이 갖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꾸어 낸다.


”파벨만스“를 스필버그의 인간 탐구 리스트에 올린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종전의 세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현재진행형으로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그의 많은 성취들은 이 영화에 담기지도 않았다. 대신 그 성취들에 어떤 가치가 매겨질지를 “파벨만스”는 예고하고 있다. 예컨대 이 영화에는 예술가가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사력을 다해 파는 힘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가 담겨있다. 새미는 우연히 촬영한 가족 무비에서 엄마의 외도를 목격한다. 그 사실을 묻어버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와중에 새미의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새미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껴안고 위로한다. 엄마도 실수를, 이기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랑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가 엄마를 엄마로‘써’만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스필버그를 대리하는 어린 새미는 이미 (사람이든 물건이든) 대상에 ’용도‘라는 값어치를 매기지 않고 그 너머를 보는 예술가다. 예술가는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도노반, 케서린 그레이엄처럼 노예 해방을 이뤄내거나, 포로를 구해내거나, 워터게이트를 세상에 알리지는 않는다. 대신 대중의 마음의 지형도를 바꾸고 변형된 지형도는 천천히 세계를 움직이다. 그 작업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스필버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쓰고 카메라 뒤에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부지런하고 지치지 않는 창작자가 아무 인물이나 탐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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