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1학년 아이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한참 키가 작은 아이들은 나무를 올려다보듯 나를 쳐다봤고 나무 기둥을 껴안듯 두 팔로 내게 매달렸다.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가끔 지나가는 1학년 아이들을 보고 ‘다 컸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이 아이들을 ‘언제 키우나’ 하며 지냈다. 이 아이들을 1년 치만큼 모자람 없이 잘 키워내야 했다.
키워야 하는 것은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외람되지만, 교사인 나는 아이들의 부모님도 함께 키워야 했다. 당시 부모님들보다 나이도 한참 어렸고, 이제 겨우 1년을 교사로 지냈을 뿐인 내가 감히 그래야 했다. 부모로서는 경력자인 그들도 학부모로서는 완전히 초보였다. 부모님들은 아이 걱정에 너무 작아지기도 하고, 혹시나 아이가 손해 볼까 싶을 때는 겁먹은 고양이처럼 몸을 부풀리기도 했다. 부모를 키우는 일은 곧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초보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겨울까지 아이들과 원주율 외우기를 놀이 삼아했었는데 봄이 되자 가위질을 가르쳐야 했다. 가위질, 풀질을 가르치는 방법은 교대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우유 급식이 시작된 날 아이들에게 우유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유를 가지고 내게 왔다. 우유팩을 혼자 열 수가 없다고 했다. 팩차기를 하던 졸업생들이 조금 그리워지려 했다. 말투도 바꿔야 했다. 유치원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말투를 쓰면 아이들이 더 좋아했다.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고, 율동을 하는 걸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초보 교사가 초보 학생들을 초보 학부모들과 함께 키워내야 하는 1년이었다.
모두가 조금씩 부족한 채 한 해. 전반적으로 유순하고 조용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친구를 너무 좋아하는데 어떻게 가까이 갈지, 어떻게 관심을 끌어야 할지 잘 몰랐나 보다. 어느 날부터 아이가 1학년 입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욕설을 쓰기 시작했다. 태권도장에서 형아들에게 배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은 형아들만 쓰는 것이라고 믿고 있던 친구들이 바로 내게 알려왔다. 친구를 모욕하려 쓴 것이 아니었고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 타이르고 넘어갔다. 그런데 아이는 여전히 친구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레벨이 높은 욕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하면 누군가는 까르르 웃고, 누군가는 깜짝 놀라고, 누군가는 선생님에게 달려가므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좋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는 어릴 때부터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재미와 치기로, 중고등학교 때는 습관적으로, 대학교 때는 그 습관을 다 끊지 못해 흘리곤 하던 욕설을 나는 그 어느 시기에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다. ‘아이씨’라는 소리가 가끔 입에서 튀어나오긴 했다. 그 정도로도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유교걸이 확실했다. 그런 내 판단에 이 아이는 초장에 교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벌써부터 그런 입버릇을 가지는 걸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아이에게 수업이 끝나고 잠깐 남으라고 했다. A4 종이를 가져와서 제일 윗 줄에 내가 문장을 먼저 썼다. “나쁜 말을 쓰지 않겠습니다” 아이에게 따라쓸 수 있겠느냐 물었다. 한글을 잘 아는 아이였다. 그 아래로 똑같이 10번을 쓰라고 했다. 아이는 침울한 채 금방 10번을 채웠다. 선생님이 왜 이런 걸 시키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안다고 했다. 이 일을 부모님에게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아이는 자기가 부모님께 다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금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그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고 하고 아이를 집으로 보냈다.
다음 날 아이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속상해서 잠을 못 주무셨다고 했다. 1학년인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처분이 아니냐고 하셨다. 그 말에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나도 1학년 아이들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욕설의 강도가 심했고, 며칠에 걸쳐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다른 아이들도 배울 수가 있고, 애초에 나쁜 습관은 들이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해 결정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그래도 주변 엄마들도 선생님이 너무하셨다고 하네요’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가혹하고 너무하다는 평가가 마음에 남았다. 진짜 가혹하고 너무한 건 아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철회하고 사무적으로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닌지 따져 묻고 싶었다. 동시에 내가 진짜 너무 어린아이에게 가혹하고 너무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도 의심을 거둘 수 없어 두 배로 마음이 힘들었다. 그때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 모든 말과 행동을 검열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정말 사무적인 것 밖에 남지 않았다. 칭찬도, 꾸중도 사무적으로. 마음을 차단하고 있는 그대로만.
그 어머니와는 화해를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사과나 용서의 말들이 오간 적은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이 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해에 나는 매일 수업을 모두 마치고 인사를 한 뒤 집에 가는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주고 교실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들도, 나도 모두 만족하는 하루의 마침 의식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들을 껴안아주고 내보냈다. 그러다가 볼일이 있어 교실 앞까지 오셨던 아이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자신의 아이를 안아주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다.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그냥 ‘그랬던 거구나’ 하고 나도 마음을 풀게 되었다.
어머니의 ‘가혹하다‘, ’너무 하다 ‘는 말은 한껏 부풀려 세운 털과 같은 것이었나 보다. 인생 경험이 결코 적지 않을 30대 후반 성인에게도 학부모라는 자격으로 겪는 학교는 낯설고 두려운 곳이기에 그렇게 경계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교실 문 뒤에서 눈물을 글썽이다가 아이를 데리고 가며 내게 고개로 인사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그 어머니는 많이 자랐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