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52일
주말 동안 많이 아팠다. 목젖과 혀 끝이 하얗게 헐었다. 해열제를 억지로 여러 번 삼켜야 했다. 반면 음식은 넘기기 힘들었다.
사흘을 꼬박 고생했지만 좋은 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전에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음식들을 먹어볼 수 있었다. 밥을 먹을 수 없으니 어른들은 나에게 뭐라도 먹여보려 이것저것 주었다. 거의 나에게는 금단의 열매와도 같았던 간식들까지 내 입 안에 들어왔다. 어른들은 내가 먹어 주기만 한다면 감사하겠다는 눈빛으로 초콜렛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주었다. 상표명을 말해도 상관없겠지. 몽쉘과 스크류바. 이 둘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던 제과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산책도 많이 했다. 집에 있으면 아프던 몸이 바깥에 나가면 한결 나았다. 나가고 싶어 꾀병을 부린 것은 절대 아니다. 바깥에서는 모기에 물린 줄도 모르다가 집에 돌아와 밤이 되면 예민하게 가려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우리는 주말 3일간 총 13km를 걸었다. 그 거리가 엄마의 스마트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유모차를 타고, 아빠에게 안겨 그렇게 나는 13km만큼의 세상을 둘러보았다.
나, 세상에 나온지 353일
특별히 피곤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노곤한 하루였다. 활동하는 시간에는 거의 눕는 일이 없는 나인데 오늘은 자꾸만 눕고 싶었다. 이불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점심 먹어야 할 시간에 두 시간, 저녁 먹어야 할 시간에 두 시간 반을 내리 잤다. 거의 잠으로 채운 하루였다. 내가 낮잠을 길게 잔 날 엄마의 얼굴에는 유독 화색이 돈다. 뽀뽀도 많이 해주고 오래 안아주고 함께 기어다니며 공놀이도 해준다. 밥그릇을 엎어도 웃는다.
나, 세상에 나온지 354일
누룽지 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들고 집 앞 정자로 나갔다. 오전이라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끓인 누룽지를 나는 참 좋아하는데 특히 밥알을 다 먹은 뒤 마시는 숭늉이 기가 막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 맹숭맹숭한 맛의 숭늉. 그 옅은 고소함이 참 좋다. 텅 빈 놀이터를 보며 마시는 오전의 숭늉 한 사발. 오늘을 거뜬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세상에 나온지 355일
간식으로 고구마를 먹다가 엄마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엄마의 입이 아주 커 보였다.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 엄마의 입도 고구마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들고 있던 고구마를 엄마에게 먹여주었다.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구마를 베어먹고는 여러 번 고맙다고 말했다. 약간 감동받은 것 같기도 했다. 뭘 고구마 가지고.
엄마를 기쁘게 하는 방법 한 가지를 알았으니 다시 실천에 옮겨봐야겠다는 들었을 때 나는 쪽쪽이를 입에 물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쪽쪽이. 울음이 나올 때나 졸음이 쏟아질 때 쪽쪽이를 물고 있으면 마음과 더불어 몸까지 편안해진다. 쪽쪽이는 그런 거다. 누군가에게 쪽쪽이를 준다는 것은 고단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은 아빠가 늦게 오는 날이기도 하고 엄마가 지쳐보이기도 했다. 입에서 쪽쪽이를 꺼내 엄마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 이거 딱 열 번만 빨게 해줄게. 어서 입을 열어보아요.
나, 세상에 나온지 356일
아빠 회사 근처에서 볼일이 있어 아빠를 픽업하러 회사 근처로 갔다. 곧 나오겠다던 아빠는 갑자기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며 조금 기다려달라 했고 우리는 흔쾌한 마음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회사 정문 근처를 왔다갔다 했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습한 공기가 가득했지만 아빠가 곧 나온다는 생각에 나쁘지 않았다. 엄마는 한 손으로는 나를 안고 다른 한 손은 손가락을 모아 모자 챙처럼 만들어 내 이마 위에 대어주었다. 나무와 꽃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같은 것들을 구경했다. 아직 아빠는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자동차와 꽃과 나무를 구경했다.
우리가 더위와 배고픔에 지쳐갈 때쯤 정문 안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 사람이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걸음걸이, 익숙한 줄무늬 티셔츠, 익숙한 손동작. 분명 아빠다. 아빠는 등에 멘 가방이 들썩이도록 뛰고 있다. 결승지점에 골인하는 마라톤 선수처럼 양손을 흔들며 정문을 통과해 나에게 온다. 나도 어느새 아빠를 따라 양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는, 아빠 품에 골인.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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