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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주차 | 네 발의 비애

by 참깨

더워서 벌어진 일

나, 세상에 나온지 373일



더위가 피크를 달리고 있다. 이것이 피크가 아니라면 너무나도 절망적이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더운 때라고 생각하며 견디는 중이다.


낮의 산책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리를 다친 아빠가 차를 가지고 출근하기 때문에 시원한 곳을 찾아 갈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에어컨과 욕조 물놀이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여름 기저귀를 차고 있는데도 땀 때문에 등허리와 엉덩이가 꿉꿉하다. 어제 저녁, 엄마와 아빠는 그런 내 엉덩이의 안녕을 위해 기저귀 채우기를 잠시 미루었다. 엎드려서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에어컨 바람을 쏘일 때의 쾌감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는데 그건 당연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저귀를 차지 않은 것이 난생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필 그 때가 저녁을 먹은 직후였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것만 아니면 더 오래 기저귀-프리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


정직한 나의 소화기관은 음식이 들어오면 자리 마련을 위해 똥을 내어놓는다. 대장 끝에서 응가 알람이 울렸다. 엄마, 아빠는 식탁에서 아직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였지만 곰곰이 생각했다. 에어컨 앞 매트 위에서 쌀 것인가, 식사 중인 부모에게로 가서 쌀 것인가. 매트에 묻은 똥은 닦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주저 없이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을 잡고 일어섰다. 엄마를 보고 응.가. 아빠를 보고 응.가.


엄마 입으로 들어가고 있던 라면 면발이 다시 그대로 흘러 나왔다. 마치 비디오 되감기를 하는 것처럼



피자

나, 세상에 나온지 374일




엄마, 아빠가 가끔 식사로 피자를 먹는 날이면 나도 맛있는 피자를 마음껏 먹게 된다.


선량하고 다정한 나의 부모는 큰 피자 한 판에서도 양이 얼마 나오지 않는 가장 귀한 부분을 항상 나에게 양보한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피자 도우 테두리. 먹기 좋게 길게 잘린 테두리 빵이 내 손에 쥐어진다. 씹을 수록 다양한 맛과 향이 옅게, 아주 옅게 배어나오는게 정말 맛있다.


이 맛있는 테두리를 왜 그렇게 조금씩만 만드는지 모르겠다.


내가 크면 테두리만 있는 피자를 만들어서 부모님 생신때 선물해드려야지. 노토핑 피자 예약.


네 발의 비애

나, 세상에 나온지 375일



브런치를 먹으러 간 카페에서 아기 의자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엄마의 레슨을 구경하러 갔던 테니스 코트에서 아빠의 힙시트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아직 내가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는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내가 기어다니는 것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어디든 내(네) 발로 가고 싶은데 지면에 닿지 않는 사지로는 어디도 갈 수가 없다.


매일 걷기 연습을 한다. 한 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후들거린다. 마음으로는 많이도 걸어갔지 싶은데 출발한 곳이 바로 내 등 뒤다. 다리가 짧고 키가 작아도 엉덩방아는 아프다. 엉덩방아를 찧기 전에 사뿐히 앉아버리는 게 속이 편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합리화를 한다. 나는 네 발로 엄청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니 아직 걷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여러 번 밖으로 나가는 날에는 그동안 애써 달래 온 안타까운 마음이 도로 슬퍼진다. 내려달라고 떼를 써도, 나를 들어올리기 힘들도록 어깨를 하늘로 쭉 뻗고 바닥으로 내려가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나의 맨발이 더러워질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안도의 한숨

나, 세상에 나온지 376일




문화센터에서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고 와서 피곤했는지 바로 잠이 들었다. 한참 자며 꿈을 꾸었다. 어딘지 모를 열대의 나라가 꿈에 등다했다 . 아스팔트가 끈적하게 녹을 정도로 뜨거운 기운이 가득 차 있는 이국의 도시를 걷고 있는 내가 보였다. (꿈에서는 걸을 수 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 더위에 누가 밖으로 나올까 하는 생각이 곧 따라 들었다. 꿈속의 내가 내 손을 내려다 본다. 손이 뜨끈뜨끈 달아 올라있다. 손으로 몸을 훑어 만져보았다. 손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몸은 더 뜨겁다.


잠에서 깨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내 얼굴을 보더니 손으로 내 온 몸을 짚어본다. 열이 난다며 병원에 가자고 했다.


코도, 입도, 귀도, 가슴과 등도 모두 괜찮단다. 선생님과 엄마는 동시에 ‘소변 검사’라는 단어를 꺼냈고, 서둘러 기저귀를 열고 소변을 받는 비닐 봉투를 붙였다.


소변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집으로 돌아와 우유를 먹었다. 물도 많이 마셨다. 그리고 쉬가 나오길 기다렸다. 만약 다시 요로감염 진단을 받는다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 손이나 발에 링거 바늘을 꽂아야 하고 오줌줄을 요도에 넣어 소변 검사도 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일이 다시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해열제의 지나치게 인위적인 단맛도 꾹 참고 한입에 삼켰다.


오줌 봉투가 빵빵하게 찼다. 엄마는 봉투의 입구를 고무줄로 묶고 종이컵에 넣어 유모차 컵홀더에 꽂았다. 열을 조금이라도 내리기 위해 나는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에 향하도록 들고 유모차에 앉았다. 소아과까지 가는 짧은 길을 내 유모차 바퀴가 예민하게 느꼈다. 과속방지턱을, 어긋난 보도 블럭을, 인도와 횡단보도를 구분짓는 얕은 턱을 넘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했다. 길 위의 굴곡을 모두 밟고 느끼며 갔더니 짧은 길이 참 길게 느껴졌다.


‘소변 깨끗하네요’라는 말을 듣는 데까지 참 마음 고생이 많았다.


불면

나, 세상에 나온지 377일




어제 시작된 열 때문에 밤에 잠을 설쳤다. 열이 나서 몸 구석구석이 시큰하다 보니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은 날의 불면은 흔한 일이지만, 어제는 수면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점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내가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자꾸 깨니까 안방에서 자던 엄마, 아빠가 아예 내 방으로 건너왔다. 나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에 길게 누워있는 나의 부모들. 안 그래도 더운데 양쪽에서 36.5도의 체온으로 공기를 더 덥게 만들고 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선풍기쪽에 누운 아빠가 옆으로 돌아 누우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나와 선풍기 사이에 뜨거운 열을 뿜어내는 성벽 하나가 생기는 셈이다. 내 몫의 바람을 모두 가로막아버린다.


안 되겠는지 엄마가 아빠를 안방으로 보냈다. 성벽이 사라지니 조금 살만해졌다.


동이 트네,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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