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7주차 | 잘가, 유모차

by 참깨

아빠의 개입

나, 세상에 나온지 380일




아빠가 내 일기에 웬일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 일기 내용도 정해주고, 구체적인 표현도 짚어주고, 일기의 끝에 어떤 사진을 넣을지까지 꼼꼼히 코치해준다. 아빠의 코치대로 하면 오늘의 일기는 이런 내용이 된다.


'주말이면 아빠가 길다란 목을 가진 거대한 괴물을 꺼내온다. 내내 잠들어 있던 괴물이 깨어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일듯한 소리를 낸다. 그 괴물의 입에 닿는 것들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괴물의 입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그 괴물이 영 탐탁치 않다. 솔직히 말해 그것이 무섭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괴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전원 코드만 빼면 완전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도 안다. 그것의 이름이 청소기라는 것도 엄마에게 여러 번 들어 알게 됐다. 아직 내가 청소기와 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스위치가 내려져 있는 청소기 헤드를 밀며 청소하기 연습도 한다.


아빠가 나를 너무 얕봤다.



잘가, 유모차

나, 세상에 나온지 381일




내가 너무 무거워졌다고, 엄마는 여러 번 유모차를 밀면서 하소연했다. 환경이 아주 열악하지 않은 이상 하루에 한 번 이상씩 하는 유모차 산책이 너무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우유 몇 병이나 과일을 사서 유모차 아래 장바구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하소연이 더 길어졌다.


결국 엄마는 유모차를 팔았다.


처음 보는 아저씨가 우리 집 앞으로 와서 곧 나올 셋째를 위해 산다며 나의 유모차를 받았다.


나는 퇴근한 아빠가 내 뒤에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유모차가 분해되어 남의 차에 실리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의 한 시절을 책임져준 나의 애마 안녕.


이제 나보다 훨씬 작은 아기를 싣고 안전 운행 하렴.


꽈배기

나, 세상에 나온지 382일



병원에 가야 하는 엄마를 대신해 나를 봐주러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산책길에 나섰다. 우리 동네에 있는 맛있는 꽈배기 가게가 산책의 목적지였다.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가 안내를 맡았다.


엄마, 아빠와 종종 가곤 하는 그 꽈배기 가게는 작지만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손님이 많으니 재고가 쌓일 틈이 없고 그래서 언제나 갓 튀긴 꽈배기를 맛볼 수 있다. 외식 사업을 하는 그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곳. 주문서를 넣고 우리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몇 분을 기다린 후 봉지 두 개에 여러 종류의 꽈배기가 가득 담겨 할머니의 손에 건네졌다.


“지금 하나 드셔보세요.”라고 엄마가 말했다. 갓 튀긴 꽈배기가 가장 맛있다며, 바로 드셔야 한다고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서서히 발걸음을 일부러 늦춰 유모차 뒤쪽으로 가셨다. 바로 그곳에서 꽈배기 시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볼 수가 없으니 순간 스파이더맨이 된 것처럼 다른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꽈배기에 뿌려진 입자가 굵은 설탕알들이 와자작 깨지는 소리, 쫄깃한 꽈배기가 입 안에서 씹히는 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 튀겨진 밀가루가 내는 치명적인 탄수화물의 향이 내 코와 귀를 괴롭혔다.


나도 꽈배기 먹을 수 있다고, 엄마는 왜 말해주지 않은 걸까.


아이스크림

나, 세상에 나온지 384일



구내염에 걸렸을 때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았다. 스크류바였던 걸로 기억한다. 입 안이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엄마, 아빠는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보라고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의 엄마, 아빠는 38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항상 냉동실에 가득 쟁여놓는다. 종류별로 2개씩 색색깔의 다양한 종류를 구비해놓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의 불만이 발생한다.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식사를 하고 과일 같은 후식도 함께 먹는데 왜 아이스크림 시간에 나는 쏙 빼놓냐는 말이다. 부모 자손 오손도손 마주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씩 녹여 먹으며 훈훈한 가족의 정을 느끼는 여름밤을 왜 상상만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엄마,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마다 나는 귀퉁이 약간을 몇 번 빨고 물러나야 했다. 나에게 그만큼을 허락하는 것도 감지덕지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나의 부모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싹 먹어치웠다.


아이스크림으로 차별받을 때마다 서러워하는 내 모습이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나보다. 드디어 회심을 한 엄마는 낮에 나갔던 산책길에 아이스크림틀을 하나 사왔다. 그리고 곧바로 우유와 요거트, 블루베리를 넣고 갈아 아이스크림틀의 6개 구멍이 가득 차도록 채우고 막대기가 달린 뚜껑을 꽂았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을 아끼는 만큼, 아껴 먹어야겠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https://www.instagram.com/babyhoongi/







keyword
작가의 이전글26주차 |  네 발의 비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