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87일
어른들이 나에게 꼭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칫솔질하기와 걸음마가 대표적이다. 엄마와 아빠는 칫솔을 물고 거실에서 양치를 하기 때문에 나는 칫솔질하는 법을 매일 지켜볼 수 있었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발을 떼고, 반대쪽 발을 떼고,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누가 직접 알려준 적 없지만 어른들이 무시로 다니는 걸음을 보고 그냥 알게 됐다. 연습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뿐.
청소도 그런 식으로 배웠다. 엄마, 아빠가 다양한 종류의 긴 막대기를 들고 바닥을 슥슥 청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청소기를, 청소포 밀대를, 롤 클리너의 손잡이를 잡고 바닥을 문지른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거실장 옆에 있는 롤 클리너를 잡았다. (청소기와는 아직 친하지 않다.) 끈적끈적한 원통 모형의 클리너를 바닥에 대고 굴린다. 클리너가 구를 때마다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 먼지, 내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붙어 올라온다. 키가 작은 나는 식탁이나 피아노 같은 가구 아래에 들어가기에도 유리하다. 평소 관리가 잘 되지 않는 거실장 아래에도 클리너를 넣어 먼지를 잡아낸다.
내가 청소를 할 줄 안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하루에 여러 번씩 나에게 클리너의 손잡이를 쥐어준다. ‘이거 가지고 놀아’라고 하지만 결국 청소 좀 해달라는 뜻이다.
내가 조금 수고해서 고생하는 부모를 도울 수 있다면 매일이라도 기쁘게 해드리지요.
나, 세상에 나온지 388일
나를 찍은 동영상이 엄마의 폰에서 누군가에게 한 번 전송되면 그 영상은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여러 번씩 재생되곤 한다. 나를 보겠다고 먼 곳에서 한 걸음에 달려오는 어른들도 많다. 엄마, 아빠는 당연하고 양가 조부모님과 이모, 삼촌, 그리고 가깝고 먼 친척 어른들에게까지 나는 사랑을 아주 듬뿍 받으며 지낸다. 아마 내가 양가 조부모님들의 첫 손주여서 그럴 것이다.
엄마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첫 손주여서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것도 맞지만, 그냥 내가 ‘객관적으로’ 너무 예뻐서 나를 좋아하지 않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엄마도 염치가 있는지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는 자기 아이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냐며 웃곤 한다. 엄마도 더 이상 우기지 않고 같이 웃는다.
엄마가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엄마의 말이 꼭 틀린 것만도 아니다.
오늘만 해도 친척이 아닌 어른들에게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빙수집에서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중년의 여성분들이 본인들의 대화를 멈추고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했다. 도서관에서 만난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아주머니도 나를 볼 때마다 너무 예쁘다고 눈을 빛내며 말씀하신다. 엄마의 독서모임 멤버들도 내 얼굴을 보느라 책에 집중을 잘 못하셨던 것 같다.
엄마 말이 ‘객관적으로’ 맞는 것 같다.
나, 세상에 나온지 389일
엄마가 스마트폰을 보다가 갑자기 아빠에게 묻는다. ‘훈기 신생아일 때 어땠지?’ 얼마 전에 아기를 낳은 친구랑 대화를 나눈 엄마는 내가 신생아일 때 어떤 아기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많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별로 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잘 잤던 것 같기도 하고 재우기 힘들어 고생했던 것 같기도 하다며 아빠에게 내가 어떤 아기였는지 물었다.
아빠의 기억도 엄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울 때는 울었고 또 잘 놀 때는 잘 놀았다고, 투정부릴 땐 부지만 순할 때도 있었다고, 잘 잘 때도 있었고 자꾸 깰 때도 있었다며 하나 마나 한 말을 했다.
내게 남아 있는 그 시절의 기억은 이렇다. 그 때 내 시력은 아주 좋지 않아서 모든 형체가 흐릿하게만 보였다. 꼭 쥔 손을 쓸 줄 몰라 허공에 허우적대기만 했다. 자주 배가 고팠고, 자꾸만 졸렸다. 배가 고플 때는 울었고, 먹을 것이 입에 들어오면 열심히 빨았다.
밤에도 배가 고플 때마다 울었다. 그러면 자고 있던 엄마가 일어나서 젖을 먼저 주고 젖과 섞은 분유도 줬다. 내가 먹는 동안 엄마는 아이패드를 세워놓고 미스터션샤인을 봤다. 엄마 어깨에 기대어 트림이 나오길 기다리며 이병헌과 김태리의 목소리와 멜로망스와 김윤아가 부르는 OST를 들었다. 내가 잠들지 않으면 엄마는 다음화를 틀었고 나는 김민정과 유연석의 목소리와 수현의 노래를 들었다.
엄마가 드라마 정주행을 끝내고 다른 드라마로 넘어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 세상에 나온지 390일
동네에 문화센터가 개관해서 7월부터 다니고 있다. 노래와 율동을 배우는 수업에 9개월부터 12개월까지의 아기들이 참여한다. 내 또래의 아기들은 아직 노래와 춤을 못하기 때문에 동행한 보호자들이 대신 노래하고 춤을 춰야 한다. 내 보호자인 나의 엄마는 내 이름을 넣어 노래를 부르고, 내 앞에서 닭, 돼지, 오리, 소를 흉내낸다. 개구리 다섯 마리가 차례로 연못에 빠지는 노래를 1절부터 5절까지 율동에 맞춰 부르기도 한다. 본의 아니게 아기들 앞에서 보호자들이 재롱을 떠는 시간이 되고 마는데 엄마는 이 사실을 이모에게는 비밀로 했다.
오늘 하루 내 보호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나의 이모는 문화센터까지 가는 길에 엄마에게 주의사항을 들었다. 엄마는 내가 다치지 않게 잘 봐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듣기에 엄마의 말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했고, 나머지 절반의 진실이 오늘 수업의 핵심이었다. 이모는 아기띠로 나를 안고 걸으며 호기롭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강의실 앞에서 헤어지기 전 엄마에게 빠이빠이를 했는데, 나와 이모를 바라보는 엄마가 내게 몰래 윙크를 한 것 같았다. 왠지 엄마와 공범이 된 것 같아서 조금 긴장됐고 또 조금 짜릿했다.
오늘 이모는 평소에 감춰두었던 장기들을 내 앞에서 가감없이 보여줬다.
이모, 노래 잘 하데요?
나, 세상에 나온지 391일
물론 내 걸음마는 아직 완전하지 못합니다. 자주 엉덩방아를 찧고, 비틀거립니다. 목표지점까지 직선으로 가지 못하고 갈지자로 둘러 가기도 합니다. 마음이 급해지면 숨겨뒀던 나머지 두 발을 나도 모르게 꺼내고 엎드리기도 합니다. 아직 바깥은 익숙하지 않아 집에서 만큼 잘 걷지도 못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제 나에게도 신발이 필요합니다. 유모차와 힙시트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탐험 정신이 있습니다. 더 멀리까지 두 발로 직접 가보고 싶습니다. 선선해진 바람과 합을 맞춰 산책하고 싶습니다.
이제 바깥에 나갈 때는 가장 먼저, 신발을 준비해 주세요.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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