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상에 나온지 394일
주말에 할머니를 뵙고 왔다. 할머니한테 간다고 하길래 항상 그렇듯 할머니댁으로 갈줄 알았는데 우리가 탄 차는 반대 방향, 북쪽으로 달렸다.
엄마와 로비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삼촌도 함께였다. 할머니는 환자복을 입고 계셨고,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셨다.
할머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나오는 동영상을 매일 여러 번씩 돌려 보신다고 한다. 할머니 댁에는 나의 옹알이 소리가, 울음 소리가, 웃음 소리가 반복 재생된다고.
우리는 함께 바깥으로 나와 걸으며 장미꽃과 벌개미취꽃을 보았다. 낮 시간이었지만 이미 가을이라 밖에 머물기 좋았다. 어쩌다 휠체어가 우리 곁을 지나갈 때마다 내 유모차가 한 켠으로 물러섰다. 유모차보다는 휠체어 퍼스트.
아빠는 평소 할머니에 대해 그다지 튼튼하지 않고 잔병치레도 잦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은 분이라고 묘사하곤 했다.
아빠의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
나, 세상에 나온지 395일
내가 물려받아 가지고 있는 신발들의 사이즈는 120, 140, 150…또래 아가들보다 발 사이즈가 큰 나에게 딱 맞는 130 사이즈만이 비어 있었다. 소모품 이외의 새 물건을 별로 사들이지 않는 나의 엄마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어제 나를 데리고 아울렛에 향했다. 그리고 점원의 추천을 받아 넉넉하게 딱 맞는 신발을 구입했다.
신발을 신고 도서관에 갔다. 서가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나보다 한 두 살이 많은 누나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걷지 못할 때에는 없던 일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걸음마의 이점이다.
집도 마찬가지지만 도서관 바닥에는 볼 것들이 참 많다. 바닥 틈에 껴 있는 먼지, 뚜껑으로 덮여 있는 배선 콘센트 같은 것들. 나는 그것들을 관찰하느라 잠깐 무릎으로 기어다녔다. 아주 잠깐이었는데도 신발을 신고 기었더니 새 신발의 하얀 앞코에 금새 때가 탔다.
엄마는 넘어지면 다칠 수 있다며 나한테 자꾸만 손을 잡고 걷자고 했다. 아마 새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을 걱정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나는 손을 잡고 걷기는 싫다. 의지하지 않고 내 두 발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나, 세상에 나온지 396일
오늘 할머니가 퇴원하셔서 댁으로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가 입원해 계셨던 일주일 동안 내 걷는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모든 어른들이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잘 걸으니 나를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라고 생각하셨나보다. 누군가 나에게 ‘훈기야, 고모할머니 어딨어?’라고 물으셨다. 나야 모르지. 나는 이제 겨우 13개월 살았는걸.
저녁을 먹으러 갈빗집에 갔다. 갈빗대 네 대를 뜯어 먹었다. 배가 부르고, 입 안이 짭짤하다. 자기 전에 우유로 입을 좀 헹궈내야겠다.
나, 세상에 나온지 397일
‘오빠. 어젯밤에 내가 훈기 잘 자는지 보려고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곤히 자고 있길래 훈기 냄새 좀 맡고 다시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훈기가 이러는 거야. (검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어어, 그러는 거 있잖아. 어어. 나는 훈기가 깬 줄 알고 너무 놀래가지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또 하는 거야, 어어를. 근데 이번에 보니까 눈을 감고서는 어어,하고 있는 거 있지? 몇 번을 더 그러더니 돌아 누워서 계속 자더라고.’
엄마가 아빠에게 한 말을 생각나는 대로 옮겨본 것이다. 나는 요새 사물들의 이름이 궁금하다. 그럴 때마다 검지 손가락을 쭉 펴고 어어,라고 하면 내 옆에 있는 어른이 내가 가리키는 것의 이름을 알려준다. 선풍기, 이불, 청소기, 공기청정기, 피아노, 보행기… 바깥으로 나가서도 나의 포인팅은 계속된다. 나무, 자동차, 강아지, 버스, 하늘, 헬리콥터, 미끄럼틀, 친구.
오늘 처음으로 들은 단어, 낙엽.
나, 세상에 나온지 398일
어른들은 내가 너무 예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질 때면 내 볼과 이마에 뽀뽀를 한다. 내 볼록한 볼과 이마에는 수많은 입술 자국들이 찍혀 있다.
내 볼과 이마에 닿는 입술들의 모양과 촉감은 모두 다르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며 나는 ‘쪽’ 소리도 미묘하게 다르다. 아주 여러 명의 어른들이 내 볼과 이마 위에서 서로 입술을 맞댄다. 입술 자국은 여러 겹으로 겹쳐 찍혀 있다.
입술 자국들 중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나의 부모들이다. 엄마가 내 이마에 뽀뽀를 할 때마다 엄마의 코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뽀뽀를 하는 김에 내 머리 냄새까지 들이마시기 때문이다. 볼에 뽀뽀를 할 때면 입술로 내 볼살을 크게 잡고 깨문다.
뽀뽀를 하지 않던 아빠도 언제부턴가 뽀뽀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조금 부끄러운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몰래 하는 경향이 있다. 나를 꼭 끌어안는 척하며 내 볼에 하는 뽀뽀는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채기가 힘들다.
#아기관점육아일기 #훈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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