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생활자 수기 #11.
‘태교를 위해 모짜르트를 들어야 해’와 같은 충고에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아이의 언어 발달을 위해 엄마가 수다스러워야 해’와 같은 조언은 무시하기 쉽지 않다. 언제나 말을 걸어주라는, 아이의 감정이나 행동을 말로 옮겨 표현해주라는, 따라 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들려주라는 육아 지침들은 내게 쉽지 않은 과업이다. 아이의 발달을 위한 적절한 자극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자주 시달린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나는 더욱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곤 한다.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을 좋아하는 훈기를 위해 먼 좌석에 앉은 관객까지 배려하는 연극배우가 되어 아이와 교감한다. 맛깔나게 웃고, 말하고, 장난치는데 뒤돌아섰을 때 남는 것은 즐거움의 여운이 아니다. 무대 뒤에서 진한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지쳐 있는 배우의 얼굴을 숨길 수가 없다. 그 얼굴을 감당하는 것 역시 훈기의 몫이 된다.
아이를 위한 말을 주로 하다 보니 원래 내가 하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누구와 진지한 대화라도 하려 하면 자꾸 말을 더듬게 된다. 내 사전에 고이 수집해 온 어휘들이 흐릿한 자국만 남긴 채 하나 둘 휘발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매일 ‘삐뽀삐뽀 경찰차’와 같은 낱말 위주의 대화를 하다 보면 검찰 개혁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에 참전할 엄두 같은 것은 나지 않는다. 훈기가 좋아하는 비둘기가 나타날 때마다 구구구 비둘기,라고 여러 번 반복해 말하지만 최근 겨우 시간을 내서 본 영화 <벌새>를 나의 언어로 평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나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면 팟캐스트를 켠다. 책도 읽고, 글도 쓰지만 그건 아이를 재우고 겨우 잠깐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효과 빠른 처방약은 팟캐스트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훈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놓고 육아 이야기가 아닌, 별의별 이야기들을 조금씩 쪼개 듣는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끝까지 집중해 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부산 국제 영화제 소식도 듣고, 좋아하는 작가가 게스트로 나온 방송도 듣고, 그냥 여성 패널들끼리 수다 떠는 일상 소재 에피소드도 꿀꺽꿀꺽 맛있게 듣는다.
아무래도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아이를 보다 보면 아이에게 말을 거는 빈도가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내가 편애하는 어휘들에 둘러싸여 빚어온 내 정체성 말이다. 아이에게 지속적인 언어 자극이 필요한 것처럼, 양육자에게도 어른의 말들로 된 자극이 필요하다.
2주 후면 꽉 찬 15개월이 되는 훈기가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말은 세 개 정도다. 엄마, 맘마, 아야 아야. 같은 월령의 아이들에 비해 말할 수 있는 어휘가 적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은 꽤 된다. 기저귀나 양말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내킬 때만) 가지고 온다. 고구마 줄까? 하고 물으면 고구마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가리킨다. 손 씻자고 하면 손바닥끼리 부비는 시늉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엄마 이쁘다고 해달라면 그 작고 낭창거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내가 나를 잃은 채 아이를 잘 돌볼 수는 없다. 그게 지금으로서의 결론이다.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