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매력에 감동이 밀려온다.
필사는 감동이다.
마음에 닿는 글귀를 따라 쓰다 보면,
그 문장 속 감정이 내 속에서 진동한다.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고,
그 여운이 내 몸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글자를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손끝에 스며드는 감정을 다시 음미하고
그 감동이 나를 울린다.
늘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글을 쓸 때마다 부족함이 느껴졌다. 글을 쓰는 자신이 가장 절실히 느끼는 부족함이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습관처럼 글쓰기 책들에 손이 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에세이 글쓰기 수업’이란 책을 꺼냈다. 목차를 넘기다 한 문장이 나를 붙들었다. "필사로 문장력, 글의 구성, 마음 치유까지 한 번에."
책 속에 소개된 에세이 한 단락이 나를 끌어당겼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필사를 시작했다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 달 동안 큰 변화 없이 시간이 흘러가자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그는 자신의 글에서 미묘한 변화를 발견했다. 필사로 쌓인 문체와 구성이 어느새 그의 글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필사로 얻은 감각이 자신의 문장 속에서 생명을 얻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필사의 효과를 이처럼 생생하게 설명한 글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도 필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여러 번 실패했던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필사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번엔 한 달을 버텨보자’는 다짐을 품고 나의 필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책을 하루 한 페이지씩 옮겨 적는 일을 일주일쯤 계속하니 다시 지루해졌다. 이대로는 또 포기할 것 같았다. 필사라는 반복을 견디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달, 아니 일 년을 지속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표를 조금 줄이기로 했다. 한 페이지가 아니라 마음에 와닿는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래 가사와 시였다. 가슴을 울리는 단단한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따라가 보았다. 정말, 한 달이 다 되어갈 즈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력보다는 필사하는 마음과 태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감정의 울림과 공감이 진동했다. 시와 노래 가사는 짧은 구절 속에 농축된 감정이 응어리져 있다. 필사를 하며 그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문장 속에 응집된 감정이 내 속에 스며들어 마치 내 감정처럼 흔들린다. 얼마 전 카페에서 한 번 듣고 푹 빠진 범진의 '인사'라는 노래 가사가 가슴에 와 박힌 적이 있었다. 작가가 겪었을 감정이 내 것이 되어 내 속을 울리고, 그 순간 필사하는 나는 글과 하나가 된다.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된 공감이 감동으로 다가와 나를 지배했다.
표현의 아름다움과 미적 경험을 한다. 시와 노래 가사는 절제된 언어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작은 예술이다. 필사하며 글자를 하나씩 따라갈 때마다 그 결마다 서린 표현의 아름다움이 손끝을 타고 스민다. 단어와 문장의 리듬, 그 속에 담긴 표현의 미가 손끝을 통해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순간, 글이 내 안에서 새로이 살아난다. 시적 표현이 주는 깊은 아름다움과 미적 즐거움은 필사하는 이의 특권이다. 이 작은 세계를 따라가며 발견하는 미는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남긴다.
몰입과 자기 반영이다. 손끝으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감정이 그 글 속에 겹쳐진다. 작가의 감정이 내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내 마음이 글 속에 흘러드는 순간, 필사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언젠가 범진의 '인사'의 가사 중 "안녕 멀어지는 나의 하루야. 빛나지 못한 나의 별들아."를 필사하다가, 내 속에 묻어둔 멀어지는 나의 하루 속에서 빛나지 못한 나의 별들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글에 겹쳐진 내 감정은 나를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게 하고, 필사는 타인의 감정과 내 감정이 마주치는 장이 된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글을 통해 내 감정을 새롭게 바라본다.
정화(카타르시스)의 경험을 한다.
좋은 글귀나 시 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단순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한강 작가의 '바람이 분다. 가라_p52' 중 사랑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정말 분명하게 잘 표현한 문단을 필사했다.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 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_p52 -
필사를 하며 그 감정들이 글 속에서 천천히 풀려나가는 순간, 내 속에 쌓인 응어리가 풀리는 경험을 한다. 필사는 응어리진 감정을 손끝으로 흘려보내는 정화의 과정이다. 단어 하나하나가 내 안에 얽힌 감정을 건드리며 녹아내릴 때, 나는 그 여운 속에서 내 마음을 가볍게 비워낸다. 필사를 통해 경험하는 정화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내 속을 맑히고 마음을 비워낸다.
작가와의 연결감을 느낀다.
필사는 작가와 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다리다. 그의 문장을 손끝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가 느꼈을 감정과 의도가 내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다. 글을 쓰던 그 순간, 작가가 마주했던 감정이 내 속으로 흘러들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같은 감정을 나눈다. 필사하는 동안 나는 작가와 함께 걸어가며 그의 세계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 연결감이 손끝에 남아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필사는 단순히 글자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한 글자씩 따라가는 과정 속에서
작가의 감정이 내 속에 스며들고,
그 의미가 손끝을 타고 나를 감싼다.
필사는 단순한 반복을 넘어,
손끝에 묵직하게 남는 감동을 통해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