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이를 호랑 애벌레로 키우고 있나요 노랑 애벌레로 키우고 있나요?
모건 하우절의 책 《불변의 법칙》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 '비효율성'을 혐오하면서도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톱니바퀴처럼 끼어 돌아가게 되는 학부모의 삶은 비효율성의 끝판왕이다.
중3이자 예비 고1이 된 아이의 세상은 아수라장이다. 점입가경이라고나 할까.
세상은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고, 그저 '완성'을 향해 정진해야 하는 곳인데 대한민국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완벽과 완성을 무차별적으로 요구한다.
거기에 부모는 거드는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게 못내 답답함에도 아이에게 가장 알맞은 학교를 찾아주기 위해 온-오프라인 입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게다가 잠춘기로 2년을 보내던 아이는 드디어 각 잡고 공부를 하며 '입시 읽어주는 엄마'가 되어달라고 요구까지 한다.
책 쓰기는 안드로메다로 갔고, 불철주야 아이 지원에 팔 할은 쓰는 것 같다.
덕분에 물건을 비우고 정리하는 일에 소홀했다. 마치, 땅에서 자라는 잡초를 주기적으로 깎지 않으면 어느새 내 키만큼 자라 쑥대밭이 되어버리듯 용도가 불분명해 '내 방'이라 쓰고 있던 현관방은 잡동사니로 무성히 채워지고 있었다.
사춘기 아이들은 방을 지저분하게 쓴다던데 우리 집 아들은 다르다. 극도의 깔끔함과 정돈을 추구한다. 엊그제 일명 잡동사니방에 쓱 들어오더니 하는 말 "엄마, 이게 방인가요? 좀 치우죠."라는 말은 무척 자극적이었다.
매사 말직구를 날리는 아이. 늘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럼에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 어제는 종일 땀 흘리며 정리 정돈이란 걸 했다.
결과는 대성공. "설마 물건을 다 버린 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바뀌나?" 하며 남편은 반신반의의 눈빛이었다. 겹겹이 쌓여있던 대형 바닥 매트와 대형 칠판으로 막혀있던 창문이 뻥 뚫렸다. 안그래도 벽 한쪽은 대형 펜트리에 가까운 붙박이장이라 작디작은 방.
그러나 정리정돈의 힘은 위대했다! 여유로운 공간이 생겨 거실 한쪽에 늘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아이의 비올라와 악보 보면대가 간만에 함께 다정히 서 있게 됐다.
어릴 적 아이가 쓰던 책상은 이제 나의 것이 되었다. 이 작은 책상 위엔 노트북, 읽고 있는 혹은 읽다가 만, 앞으로 읽을 책들이 수북이 놓여 있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스무 장쯤 되는 포스트잇은 절반으로 줄었고, 한동안 방치해두었던 '다이어리 캐시 북(일기와 가계부 합체본)'은 북스탠드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은 선선한 초여름의 낭만적인 바람이 일렁이며 다가왔다. 선풍기는 1단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고, 거실 너머 바라다보이는 한강 풍경이 오늘따라 더 근사하게 보였다.
역시, 정리 정돈의 힘이지 ㅎㅎㅎ
다시 모건 하우절의 문장을 들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데이터, 더 똑똑한 예측이 아니라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가장 알맞은 학교를 보내기 위해 더 많은 정보와 더 전략적인 마인드를 갖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허울 좋은 것들은 과감히 빼야 한다는 것이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책 <꽃들에게 희망을> 스토리가 생각났다. 숱한 경쟁과 모진 시간을 견디며 기둥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게 된 호랑 애벌레. 반대로 참된 자신을 찾기 위해 다른 길을 향해 떠난 노랑 애벌레가 말이다.
나는 내 아이를 호랑 애벌레로 키우고 있는지, 노랑 애벌레로 키우고 있는지.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저릿했다.
부모인 나는 아이에게 변하지 않는 '참'을 찾을 수 있도록 먼저 나의 '참'을 찾고 그릇되지 않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대입도 아닌, 고입을 앞두고 생각이 많았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