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를 불편해하는 이유 2024.01.26
詩라는 장르
편안을 주면서도 한편 불편한 영역이다.
시 아닌 듯한 고백이 시로 다가올 즈음, 그 순간의 반짝임이 가장 요긴하고 반갑다.
잠깐의 대사로 전체 상황을 꿰뜷고 에두르며 스쳐가는 단역배우의 자리에 시가 있다.
주연과 조연의 촘촘한 대사를 가능하도록 하는 요긴한 대사들, 때론 전광석화같은 촌평으로 스치는 인생자리에 시가 있다.
일인극도 있다지만 주연만으로 연극을 완성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시만으로 인생극 역사극을 완성시킬 수는 없겠지.
그래서 시인은 모든 것을 완성시키지만 드러나지않고 사소하다.
시가 고백이 아니고 적극적 대사일 때, 시의 자리는 위태롭다.
말하려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마음과 감정의 다리를 놓는,
입이 열리려다가도 소리가 도착하기 전에 입술과 표정으로 공감을 연출하는 것은
시가 언어 이전에 언어이고, 논리의 그릇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언어 이전이며, 그릇일 뿐 내용물이 아니다.
언어의 길은 열려 있고, 그릇은 비어 있는 채로이다.
시처럼 행세하면서 시 아닌 그 뭔가를 하려는 양다리는
종종 불안하기 짝이 없다.
양다리 걸치는 시인은 제어하기 힘들고 그럼에도 보살핌이 필요하다.
내가 시를 불편해하는 이유일 것이다.
시 앞에선 나는 편안하고픈 이기심만 춤출 뿐
시를 보살피고 챙기는 돌봄의 마음이란 추호도 없으니
시 앞에서 박수를 치면서
다시 시 앞에서 눈을 흘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망가고 싶지않은데 도망가게 하니까.
아마도 시 스스로도 알 것이다.
시 스스로도 불편할 것이다.
태초의 시의 자리, 인간 실존의 무게가 강렬하니-
나는 그래서 시를 쓰지 못한다.
그 블랙홀의 무게에 질퍽하게 빠질까봐 넘보지 못하고 불편하다는 흰소리만 날린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원시인이라고, 나의 원초적 별명으로 퉁치며
시와 시인에게 애증의 맘을 미리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