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동화
파스텔 톤 배경에 곧 키스하려는 두 남녀. 한국에서 개봉한 메인 포스터만 보면 뜨거운 로맨스를 기대하게 만든다. 맞는 얘기지만 북극의 얼음이 만연한 위 포스터가 더 마음에 들어 포스팅에 사용하기로 했다. 영화가 끝난 뒤 시간이 흐를수록 하얀 눈과 얼음의 잔상에 뒤덮였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냐 묻는다면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럴 수가 없다. 제목 따라 '투 러버스(연인)'와 '베어(곰)'가 등장하고 설명대로 두 남녀의 사랑을 향한 여정이 맞지만 평범한 한 관객으로서는 어떤 장르인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로맨스였다가 스릴러로, 모험기로, 또 다른 장르로 넘어가는 희한한 전개다. 다음 장면을 예상했다간 늘 뒤통수를 맞는다. 그렇기에 한 순간에 영화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감독 킴 누옌은 다양한 장르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영화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인터뷰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든 감정이 다 사랑을 가리키진 않지만 사랑은 모든 감정을 가리킨다고. 로만(데인 드한)과 루시(타티아나 마슬라니)가 겪는 일련의 장르들은 모두 그들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니, 로맨스가 맞다고 말이다. 다른 말로 청춘 영화가 어울린다. 로만과 루시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듯 온 '북극이란 고립된 땅의 끝'에서 만나 각자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보듬고 싸우며 '미치도록 아프고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다 루시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고 '꿈을 포기할 수도 없고'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 둘은 결국 '결과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금의 열정'에 몸을 싣고 함께 남쪽으로 '눈보라를 뚫는 모험'을 헤쳐 나간다. 사실 극한의 추위와 눈폭풍 속에 스노모빌만 타고 남쪽 대지로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시신으로 발견되는 게 보통의 결과다. 하지만 로만과 루시는 서로의 사랑을 믿고 함께라는 뜨거운 용기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나아간다. 이 모든 감정과 과정은 너무 아프고 너무 행복하며 자극적이고, 불 같고, 젊다. 청춘을 대변한다. 구덩이에 빠져 다리가 갇힌 상황에도 노래를 부르고 칼로 얼음을 파다 피가 나는 장면들은 우리네 청춘과 닮아있다. 결국 그들은 예상대로 죽었다. 하지만 상관 없다.(로만과 루시에게 상관 없다는 뜻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얼어 붙은 그들의 시체는 따뜻해 보일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곰이 말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의 모호함이다. 말하는 곰은 로만의 친구로 등장한다. 그의 환상인 듯싶지만 주변인들이 곰을 곰으로 인정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말하는 곰은 현실이 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미학 용어는 분명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고 믿기 힘든 현상이나 사건을 마치 현실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독은 "곰의 존재를 애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 <샤이닝>(1980)에서 상상 속 인물 바텐더가 유령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주인공에게 진짜 술을 따라주고 주인공이 실제로 마신다"며 "하지만 이런 일들은 전부 현실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에,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곰, 너는 누구냐
곰은 항상 불쑥불쑥 나타나 로만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말한다. 조언과 충고를 하기도, 실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곰만이 늘어지게 느리고 여유롭다. 온몸이 하얗고 모든 것을 관통하는 말을 하는 것이 <브루스 올마이티>(2003)의 캐주얼한 신을 연상시킨다. 이 동물은 로만만이 대화 가능하다. 로만은 대학에 합격한 루시에 좌절해 이별을 고하고 술과 마약에 절어 산다. 그때 곰은 로만을 자극한다. 루시와 동행을 시작하고부터는 더 가볍고 유머 있게 로만을 대한다. 로만의 내면을 나타내는 곰은 왜 위험한 모험 속에 더 여유로울까. 모험은 위태롭고 활발한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위기가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에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인간 내면에 초월적인 평화가 생겨난다는 것을 상징한다. 신 또는 초월적 존재, 혹은 로만 자체, 어쩌면 북극이란 신비한 환경 전체가 될 수도 있겠다. 단정 지을 수 없는 궁금한 녀석이다.
데인 드한
사심 가득한 문단이 되겠다. 처음 <투 러버스 앤 베어>를 찾았을 때 유일한 정보는 데인 드한이었다. 평소 그의 팬이기도 했지만 늘 새로운 연기, 배역, 영화에 도전하는 그가 궁금해서다. 실망은 없었다. 로만이란 배역에 완전히 빠져든 빠져든 데인 드한을 확인했다. 멜로 연기에서 여심을 흔들 거란 예상은- 선을 넘어 넘치도록 흔들렸다. <킬 유어 달링>(2013)에서 상처 투성이에 사연 있는 캐릭터로 퇴폐미를 내뿜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상처와 사연이 뭉쳐 그의 우울한 표정이 돋보였다. 자꾸만 상처 주고 싶게 만드는 배우다. 데인 드한의 팬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쉽게 포기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몽환적이기까지 한 북극. 하얀 영상들은 신비롭게 당신에게 넘실댈 것이다. 어렵고 새로운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러닝타임 내내 빠른 장르의 전환과 판타지와 현실의 넘나듦이 일방향적으로 파도쳐 머릿속이 백지가 되겠지만, 사실은 온갖 감정의 깨달음이 퇴적되는 과정이다. 마지막엔 엄청난 생명력이 내면에 숨 쉬는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사랑에 똘똘 뭉쳐 있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