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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Sep 28. 2019

진선미

진선미

오늘도 노년백수 신세로 창문을 열고 더 가깝게 보이는 한라산 위 구름을 하염없이 보다가 망상과 공상의 중간 지점이랄 수 있는 객관성이 좀 부족한 생각을 하면서 

생각대로 글을 써 본다. 

가끔 내 마음에 머물다 사라지는 게 있다.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아우른 진선미이다. 삶의 모습이나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우리에게 다가오는 진선미도 모습을 달리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폭과 눈높이도 나이에 따라 변하는 모양이다. 나의 가치관도 세월을 더함에 따라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십 대 전후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미(美)가 나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다. 사회활동이 왕성했던 마흔 무렵에는 세상을 거스르거나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서. 선(善)이 삶의 지표였던 것 같다. 노년에 접어든 지금은 진(眞)이 턱 하니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아마도 나의 추한 모습은 남기고 싶지 않아서일 게다. 남은 사람에게 거짓 없는 삶을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진선미 아닌 미선진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진선미면 어떻고 미선진이면 어떠랴 마는. 진선미 세 글자에 담긴 뜻보다는 사람 이름이 떠오를 때가 있다. 미 씨 가문에 진선이란 이름 가진 이가 한둘은 아닐 것이다. 선 씨 성을 가진 사람은 미진이라 이름 지어도 어색하지 않다. 진 씨 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선미라 불리어도 좋을 것 같다. 셋은 분리할 수 없는 조합으로 우리의 실생활에 맞닿아 있는 같은 느낌 이다. 

진선미는 미인선발 대회에서 순위를 매기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진선미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인식되고 공정한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 것을 고려하면 미인선발에 진선미를 가져다 쓰는 것은 권장할 일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미에 순위를 매기는 자체도 불합리해 보인다. 진선미에 오른 이가 미인대회 이전의 진과 선에 흠결이 있어서 누리고 있던 미인 자격을 잃는 예를 보았다. 지금은 안방을 찾는 뉴스에 알몸의 진행자가 등장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꾸민 미도 부족하여 본능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미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가림 막 뒤에 숨어서 행동한다면야 거리낄 것도 없고 크게 흠 잡힐 일도 없다. 내면의 욕구나 충동을 남 앞에 숨기는 것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세상에 완벽함이 존재하지 않듯 진과 선과 미 셋을 두루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 셋 중에 어느 하나만 갖추어도 나머지 둘은 저절로 격상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둘을 갖췄다 해도 하나가 미흡하거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면 그 둘은 격하될 게 뻔하다. 

연기자가 극 중 주인공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면 종전과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진선미도 본모습과 같거나 다르게 연출될 수 있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 없음에도 있음이 들어설 여지는 있다. 대중에게 드러나려면 그만한 바탕에 연기력이 더해져야 할 것이지만, 지속 가능한 마음속 본연의 보석을 널리 나누다 보면 진정한 의미의 진선미도 자리를 잡을성싶다. 겉으로 쉬이 드러나지 않는 진과 선은 가꾸기도 어려워 항상 눈속임의 유혹에 놓여있기도 하다. 애써 가꾼 진과 선이 둘러맞춘 미로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미완의 허기진 영혼은 자연스레 진선미를 불러들일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은 만큼 채우려는 욕구가 최고의 선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줄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만의 독존적인 삶에도 목적이나 조건이 따르면 불순해지기 마련이다. 그 오염된 늪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누추한 옷은 벗어야 한다. 지금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 던질 만한 용기와 힘은 나에게 남아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반복해 보지만 자신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당장 단정 지울 수 있는 게 세상에는 없다. 그런 까닭에 처음 느낌으로 모든 걸 속단하고 포기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내 몸에 맞는 약도 삼켜야 효험을 볼 수 있다. 이제라도 진선미가 찾아들 좁은 문을 활짝 열어둘 일이다. 열린 문은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닫히는 문은 버팀목으로 고여야 하지만 그 버팀목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서 아무나 쉽게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추구하는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 한들 거짓 없는 평범한 삶만큼 절실한 것이 있을까도 싶다. 몸에 좋다는 음식이 한 둘 일까마는 진선미만 한 정갈한 음식도 드물다. 가짓수 적은 음식이지만 풍성한 밥상인 만큼 장만이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SNS 공간에 나의 몇 줄 글과 나잇살이 붙은 투박한 얼굴 사진을 함께 올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최고 아름다운 이는 바로 당신일 것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내가 가장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이제 그 해답은 길지 않을 나의 남은 생(生)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며칠 뒤 나의 글과 사진 아래에 짤막한 글이 달렸다. ‘친구님은 아름답기보다 남자다운 외모니까 장미처럼 예뻐지면 그 글에 좋아요 누를게요.’라는 나의 심중을 용케도 알아차린 글이었다. 페이스북 여성 친구의 댓글은 장난기가 있어 보였지만 정감이 갔다. 내가 올렸던 글이 나에게 한정된 것도 아니고 외적인 아름다움을 말함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외모를 들고 나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투박함보다는 선이 굵지 않은 부드러움을 여성들은 좋아하는가보다. 그래 장미처럼 예뻐져야겠구나. 

세월을 겪을 만큼 겪은 지금이다. 내일을 여는 기대감으로 나를 다그치는 일은 버겁기만 하다. 진선미 앞에 놓인 문턱은 의문과 머뭇거림을 용납지 않는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진과 선과 미를 피할 이유도 없다. 잠시 머물다 떠날 진선미보다는 내 삶에 안착할 진선미라야 바람직할 것이리라.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 마음 두드리던 진선미에 더 일찍 빗장을 걸어둘 걸 하는 후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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