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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Dec 03. 2017

평등과 불평등

평등과 불평등

장시간 비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지루함과 불편만 남기 시작한다. ‘이코노미클래스 신드름’이라는 질병으로 인정받는 불편함, 마치 18세기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떠나던 배 안에 갇힌 노예들과 같이 비좁은 공간에 우리는 갇혀 있다. 비행시간이 10시간을 넘으면 더 이상 짜증낼 기운조차 없다. 

하지만 장시간 비행의 진정한 ‘비극’은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경험하게 된다. 굳게 잠겨 있던 커튼이 열리고 비즈니스 퍼스트클래스 좌석을 지나가며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아방궁같이 거대한 공간, 우리 집 침대보다 더 편해 보이는 좌석, 최근 결과에 따르면 비즈니스 퍼스트클래스를 지나 걸어간 이코노미클래스 승객분노가 통계적으로 가장 심하다고 한다. 장시간 비행이야말로 현대인의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 할 수 있는 불평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왜 존재하는가? 물론 인간은 다양한 능력과 선호도를 가지고 태어나고, 우연히 결과 덕분에 특정조건의 가족, 나라, 시대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왜 나는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 했을까?” 라고 질문하면서도 우리는 “왜 아프니카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평등을 무작정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드려야 할까? 물론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무차별적 평등이 정답일 수도 없다. 건전한 수준의 불평등이 없이는

혁신과 변화에 대한 동기 역시 사라진다는 것이 인류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혁신과 변화의 동기가 되지 못하는 불평등은 사회에 독이 된다는 사실 역시 역사의 교훈이다. 노력과 혁신을 통해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것이 불평등의 건설적 역할이지만, 만약 이코노미승객은 영원히 비즈니스클래스로 업그레이드 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추락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상식의 폭력

지극히 순진하고 소박했던  한 시절 내가 간절히 꿈꾼 것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 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상식’이란 ‘보통사람으로서 으레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이나 판단력’이고, 내가 바라는 바 역시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이었다.

세상이 거짓과 협잡과 투기와 음해수레바퀴로 굴러 가지 않기를 바라며, 조금은 더 투명하며 공정하고, 당정해지기ㅐ를, 물론 그 ‘이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조금은(사실은 많이)덜 순진하고 덜 소박해진지금의 나는 슬금슬금 내가 소망했던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곤 한다. ‘보통 사람’이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집단인지, 그들의 으레 가지고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전체가 명확한 대상과 맞서면 싸움의 승산은 저울질 할 수 있고, 그래서 한번 붙어보자며 웃통을 벗어 붙이거나 급하면 출 행랑이라도 칠 수 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과 맞서면 누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공포부터 느끼기 마련이다. 짐짓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식’이 때로 폭력으로 다가 오는 것도 그런 이치다.

상식의 폭력은 언제 어디에 서나 접할 수 있지만 그 노골적인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은 다름이 아닌 인터넷이다. 인터넷 이용자 3000만 명 시대에 더 이상 누가 네티즌이고 아닌가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놀라운 정조 전달 속도와 파급력으로 볼 때 전 국민의 마우스를 부여잡고 뚫어져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보통신 강국에 살면서 운신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지하철에서 남의 카메라에 찍혀서, 누군가는 집요한 기자와의 인터뷰에 말실수로, 또 누군가는 교제하던 연인을 모질게 찾다가, 그런 하면 누군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직업이나 외모만으로 익명의 감시자들에게 집중포화를 당한다. 

인터넷 댓글을 읽노라면 한국어거 여간 그악하고 잔인한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어지간히 강심장이거나 학대당하며 즐거워하는 마조히스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순간을 모면하고 외면하는 것만 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형집행을 참관한 작가 디킨스가 기술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악함과 경박함’보다는 자신이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 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않은) 채 당당하게 옳은 일을 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이기 때문에,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일은 추한 것이기 때문에, 배신은 돌로 쳐야 할 짓이기 때문에, 잘난 척 하거나 있는 척하는 꼴은 봐줄 수 없기에…… 

나는 정의의 편이고 그들은 응징돼 마땅하다! 상식적으로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다. 확신에 찬 그들에게 인권이 가장 중요한 이념이 바로 상황이 ‘차이 없이’  보호대야 한다는 것이라는 이치를 설명하기란, 철학자 슬라이히르트의 견해대로 관용은 호감으로부터 비롯된다기보다 상대를 향한 거부감과 역겨움을 참고 견딘다는 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보통사람이 으레 갖고 있는 상궤에서 벗어나는 일까지 옹호해야 하는데? 이 이유는 정말 ‘상식적’이다. 그것은 당신의 지켜야 할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을 지킬 수없는 누군가를 위한 일임과 동시에,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이 아닌 한 타인에 대해 반드시 특별할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보호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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