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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Dec 21. 2017

모든일상은 행복

스스로 행복하기

얼마 전 유선 TV채널에서 앞을 못 보는 아버지가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을 혼자서 키우는 다큐를 시청했다. 어린 아들도 앞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앞 못 보는 아버지는 아들의 시력을 찾아 줄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한 끼는 굶는다고 했다. 빙판길을 수없이 넘어지고 부딪치며 익힌 자전거를 끌고 가는 그의 모습은 눈 덮인 들판에 홀로 선 외로운 겨울나무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은 혹한의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오르지 아들위해 험한 일도 가리지 않은 한 아버지의 삶은 눈물겨웠지만 아름다웠다.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아들을 껴안고 어르는 것을 보며 누가 모성(母性)만 강하다고 하겠는가? 모성보다 부정(父情)을 느끼는지 아기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그이 작은 방 안에 가득하다. 인간승리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생각이 되었다.

그들 부자(父子)를 보며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행복조건을 갖추었어도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별다른 취미도 없이 날마다 같은 일을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삶을 회의가 들어  가끔은 내키는 않은 산행이나 흥미도 못 느끼면서 의식적으로 운동을 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의 안성맞춤인 무료한 시간을 TV 앞에 멀거니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요즘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노년에 생기는 우울증이 걱정이 된다. 이러한 나의 단조로운 삶은 언제까지 이어갈까? 하는 자조적인 마음으로 지냈기에 시력을 잃은 부자(父子)의 눈물겨운 생활을 보면서 안이하고 무료한 감상에 빠진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육신이 멀쩡하면서 멍하니 보내는 인간치고 잘된 사람 못 봤다는  유년시절 나의 어머니의 질책이 들리는 뜻 했다.  소시민의 일상에 어떻게 감격과 흥분이 있는 시간이 날마다 벌어지겠는가, 그래도 하루를 보내 기분 좋은 일, 즐거운 한 둘은 생기기 마련이다. 새벽에  대문에 광고지 등 던지지 않으면 그날하루 기분은 좋게 시작된다. 

거의 매일 사체업자 광고 카드. 식당 홍보지, 광고 낱장 광고를 일일이 줍는 사람이라면 이해 할 것이다.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목이 말라서 냉장고문을 열고차물을 꺼낼 때의 기쁨, 외출 할 때 갈아 신은 구두가 발에 맞아 편리하다든지, 옆집 이웃과 반가운 인사를 나눌 때 한 없이 즐거움을 찾아야 될 것 같다. 이런 사소한 일상의 일들에서 행복을 찾아야 될 것 같다. 공기나 물처럼 늘 존재하기 때문에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일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어디든지 두발로 다닐 수 있고, 안내 표지판을 읽고 어디든지 찾아 갈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일상의 일들을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없게 된다면 난감하리라. 마치 운동화 끈을 맬 때 손과 발의 쓰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가 손발이 쓸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작은 행동이 주는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은 고마운 것을 잊고 산다.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전동차가 달려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탔을 때, 정액권의 잔액이 조금부족 한 때도 개찰구를 통과 할 때 유쾌한 기분, 책꽂이에서 불쑥 뽑아든 책갈피에서 몇 장의 고액지폐가

나왔을 때 큰 횡재라도 한 기쁨에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행복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렇듯 행복 할 일이 사방에 널려 있다. 예전에 좌골 신경통을 않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고통스러웠을 때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지금은 완행이지만 변함없이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매일 몇 번씩이라도 타고 드나드니 행복한 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삶의 무의미해서 무료하다느니, 살맛이 어쩌니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행복에 겨운 푸념인데도 말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유명한 바이불의 한 구절이 있다. “일상생활 모두가 일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감사하라, 작은 일을 고마워하는 마음이 곧 행복이다.” 자신의 소유한 행복을 자구만 하찮게 여기는 것은 문제다. 현재를 만족하며 살려면 어느 정도나 수양을 해야 할지.  개는 여전히 수련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스스로 행복하려면 운동처럼 습관을 들여야 될 것처럼 생각이다. 

행복한 나를 만드는 일은 내가 직접 해야 할 몫일뿐 누가 대신 해줄 수 일이 아니다. 자잘한 일에 즐거움을 찾으려 하면서도 종종이 나의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조용히 자연의 언어를 몸으로 표현하는 겨울나무를 생각한다. 가진 것을 다 떨구고 매서운 추위를 견딜 만큼 견뎌내며 서있는 나무, 따스한 봄 오기를 기다리며 안으로 희망과 행복을 품고 있을 겨울나무의 의지를 생각 본다. 

봄이 되면 지난겨울의 혹한을 이겨낸 기쁨을 새싹으로 틔워낸 기쁨을 만끽하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한다.

아들을 위해 온몸에 피멍이 들어가면서도 즐거이 눈먼 아버지의 성정으로 봄이 되면 아기도 시력을 되찾기를 소망해 본다. 나 도한 유치한 망상에서 벗어나 겸손한 마음으로 연록의 옷을 입은 나무 들 속에서 내게 주어진 행복의 환경에 감사를 드리면 살려고 노력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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