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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Mar 03. 2018

비오는 날

비 오는 날

쏟아지는 비를 피해 제주해안도로 옆에 줄줄이 들어선 한 카페에 들어갔다.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은 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통유리 앞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연보라 빛 바다가 온통 비에 젖어 있었고 빗소리에 모든 소음이 묻혔다. 커피는 진했고 유리창밖엔 격렬하게 물방울이 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왠지 삶을 한 템포 늦추고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한 장 유리의 안과 밖. 내 삶에도 따뜻한 실내의 커피 향처럼 안온했던 순간이 있었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비를 고스란히 맞을 때가 있었다. 빗물에 나뭇잎들이 쓸려가듯, 아프고 추웠던 시절도 세월과 함께 흘러갔다. 멈출 것 같지 않은 세찬 빗줄기도 조금 있으면 소리 없이 멈출 것이다. 빗소리는 생각에 젖게 만들고 기억을 유년의 모퉁이로 몰고 간다.     

소싯적 추억이다. 어릴 때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골목길 옆 지붕 밑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네모로 뚫린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빗줄기는 세차게 사선으로 떨어져 마당에 부서졌고 타닥타닥 빗소리가 처마를 아프게 두들겼다. 홈통을 타고 빗물이 숨 가쁘게 쏟아지면 수챗구멍이 물줄기를 거세게 빨아들였다. 마당의 나무들은 꿋꿋하게 서 있었지만 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던 여린 잎들은 물방울을 매단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주위는 더 적막했다. 하필 그런 날 어머니마저 집에 안 계시면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대문을 쳐다보았다. ‘삐익’ 초인종 소리만 들어도 어머니인지 알 수 있었다. 빗속을 뚫고 마당을 가로지르다 급한 마음에 무르팍을 깼다. 누구냐고 물을 것도 없이 떼꺽 대문의 빗장을 열게 만드는 힘, 그것은 어머니만의 자기장 같은 것이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면 집이 꽉 찬 것 같은 안정감에 스르르 마음이 놓였다. 온 식구가 집에 있고 어머니가 상을 펴고 수저를 놓느라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삶의 초상화였다. 찌개 끓는 냄새가 나고 노릇노릇한 생선구이에 시장기가 돌았다. 나는 여전히 대문 앞에 비를 피해 잦아드는 비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밥 먹어라!’하고 부르시길 기다렸다. 따스한 부엌 불빛과 촉촉하게 젖은 한옥 마당의 알싸한 흙냄새는 한데 어우러진 평화로움이었고 그 기억이 나중엔 그리움이 되었다. 

그 시절, 막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던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까? 동화책을 사려고 오래도록 용돈을 모아 드디어 지폐를 손에 쥔 날이었다. 책방에 가는 도중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챙기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급한 마음도 책방 쪽으로 더 쏠려 있었을 것이다. 무작정 뛰어가는데 손에 쥐고 있던 지폐가 쥐어짜면 물이 나올 만큼 젖었다. 몸이 비에 쫄딱 젖었지만 신경은 온통 돈에 가 있었다. 물이 들어 번지면 어떡하나 싶어 사뭇 걱정이 되었다. 책방 처마 밑에서 조심스레 손바닥을 펴보았다. 지폐는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다행히 인쇄는 선명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책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즘 애들에 비해 참 어수룩하던 나의 옛 모습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동네매일시장에 가셨는데 비가 쏟아졌다. 우산 없이 나가신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내 새 옷이 젖을까 봐 더 마음이 쓰였다. 마침 비가 줄어들자 동생을 유모차에 태우고 동문통 로터리로 마중 나갔다. 동생은 엄마가 보고 싶어 칭얼댔지만 난 비에 젖는 옷이 더 더욱 걱정이었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버스가 여러 대 지나갔다. 유모차를 흔들며 오래도록 서성였고 지루함을 채우려 동문통 로터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길옆 빵집에선 구수한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칭얼대던 동생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낯익은 모습이 눈에 잡혔고 반가움에 손짓을 했다. 양손에 짐이 한가득인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조금 웃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내 몫으로 무엇을 삿느냐고  물었다. 

“집에 가서 보여줄게.”     

짧게 대꾸하셨을 뿐이다. 내 새 옷은 무사한 것 같았지만 어쩐지 어머니의 눈치가 보였다. 피곤하신 걸까? 추석명절을 앞둔 어머니의 육체적, 경제적 부담감엔 생각이 미치지 않던 나이였다.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유모차를 미는 내 발걸음이 빨라졌고 젖은 땅에 유모차 자국이 길게 찍혔다. 우리 자매는 9남매였다. 지금 그 당시 9남매 중 한 사람은 먼저 하늘나라로 첫출발을 하였다. 다음은 누구 차례인지 모르지만,  연령순서도 아니지만  순서대로 떠나야 할 것이다. 


이제 추억의 꿈에서 깨어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비 내리는 풍경은 비슷한데 이미 어른이 되어 찻집에 앉아있는 내가 문득 낯설다. 어느덧 먼 길을 지나왔다. 유년 시절은 흘러갔지만 설렘을 담은 기다림은 아직 내게 유효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날이 개었다. 멍하니 유리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나온다. 비 온 뒤의 말간 거리가 상쾌하다. 나는 물기를 머금은 거리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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