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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Feb 21. 2018

중년부인들의 수다

젊은 여인들의 수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들이 앉아서 껄껄거리며 외설적인 우스개를  즐기고 있다.

“20대 성폭력범이 붙잡혔대, 산대는 70대 할머니란다. 할머닌 줄 알았으면 성폭력을 아니했을 텐데 모르고 그랬다면서 범인은 버티고 있고, 경찰이 다그치는 중인데 피해할머니가 경찰 문밖에서 기웃거리더래, 범인이 너무 괘씸해서 피해 할머니가 그러나 보다 싶어서 담당경찰관이 할머니를 보고 말했는데 ‘할머니, 우리가 잘 조사를 해서 엄격하게 벌을 줄 태니 안심하고 가 계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위로 겸 다짐을 해주었는데도 그 다음 날 또 왔더라는 거야, 그리고는 이번에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유치장을 기웃거리며 범인을 찾으면서 뭔가 말할  눈치 더레, 그래서 담당경찰관이 다시 한 번 할머니한테 ’집에 가계시면 우리가 단단히 조사를 해서 법적으로 처리를 할 텐데   왜 자꾸 오시느냐? 고 물었는데, 그랬더니 멈칫거리던 할머니가 말하기를, 경찰 나리, 그 젊은이를 조사하려면 현장검증이라는 한다는데 그걸 하자면 내가 있어야 하지 않겠수? 그게 언제인지 알아야 노인정에서 가는 단풍노리를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나도 정 할 수 있을게 아니우?” 

이 대목에서 웃음들이 폭발하며 키들키들 거리면서 재미가 있어서 죽을 것처럼 웃어젖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식당 한 구석에서 식사를 하던 나도 같이 따라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70대가 아닌가! 그거 바로 나의 삶이 이지 않아!” 

이 괘씸한 젊은 것들은 걸핏하면 ‘70대 노인 들“을 들먹인다. 서글퍼진다. 그래, 나는 70대다 나의 와이프도 70대다.’요즘 젊은이들은 70살을 먹으면 사람이 아닐 줄로 안다. 걸핏하면 70대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우스개가 많은 것도 그런 증좌다.

하기는 그럴 것이다. 옛날에 나도 그랬으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70대가 되기까지 사는가,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리 오래 살까, 삶에 윤기가 없고 추해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런 나이가 되면 회로애락도 다 바라서 탈색한 마 점한 옷감처럼 무색 해질 터인데 그런 삶을 초라하고 무의미해서 어찌 살까, 나는 그런 모습을 세상에 보이지 말고 그 전에 k라 졌으면 좋겠다. 고 그런 생것을 했었다.

지금 내 곁에서 낄낄거리며 저렇게 우스개를 즐기고 있는 “중년 부인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젊은 것들이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키들거리게 만들며 들먹여지는 70, 80할머니에는 아직도 내가 속해있지 않은 것처럼 착각 속에 내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도 아주 놀라운 것은 젊은 날에 생각 했던 것처럼 70이란 나이가 그렇게 무색하지도 무미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사고(思考)에도 무디지 않고 감각이나 피부가 그렇게 많이 이완되거나 낡아지지도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그렇게 후퇴하지 않을 만큼 머리도 몸도 꽤 쓸 만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그리운 사람 기억날 수 있고, 아름다운 날들에 대한 추억이 마당 앞 정원에 있는 겨울 들국화처럼 겨울추위에 말라 날아가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주변에서 내가 오래 살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사람의 수도 날로 줄어간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운 날들이 갈수록 심하게 노골화 될 것도 짐작한다. 너무나도 심산하게 젊은 날을 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뒤따르는 후생들을 위해 절치부심하며 애써온 지난날의 우리삶이,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는 깃털처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고, 어디 다른 우주에서 온 것처럼 우리들을 우습게 보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세상, 우리가 젊었을 때는 노인은 지도자였다. 

노인의 지혜로 대사를 모두 처리했다. 그러나 컴퓨터 혁명이 일어난 30, 40년 사이에 세상은 풍지 박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노년은 패대기처럼 운명에 다다라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이 소중하고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워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는 

현인들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옛날에 우리 소싯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태고에 태어난 사람 옛이야기를 잘 들여 주셨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랑’ ‘꿈’ ‘권능’ ‘희망’에 대한 것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인가 하는 의문도 해보았던 어린 시절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당시에 할머니 그 이야기가 재미있으세요? 하면 “ 그럼, 재미있다마다. ……” 하시던 할머니 목서리가 기억에 난다. 괴테가 80세가 넘어 10대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애정이 거짓말처럼 여겼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피카소가 80대에 어린 딸을 안고 희열에 차서 보여주던 표정이 좋게 보이지 않던 지난 날고 나는 기억 속에 지니고 있다. 지금 와서 그렇지 말았어야 했다고 반성하며 생각한다.    

더구나 젊은 날을 부정과 불평으로 생산적인 인생보다 파괴적인 삶으로 물들여 온 세력이 우리에게는 지금 너무 많다. 그들은 뒤따르는 후생을 마치 양아치처럼 만들어 수하에 두기를 서숨치 않고 지배를 기도(企圖)하는 세력들이다. 그들에 이끌려 멋도 모르고 어른을 우습게 아는 일에 날마다 길들여져 온 젊은이들을 보는 일이 우리는 너무나 걱정스럽다. 

그들도 곧, 아주 곧 나이 많은 날을 맞을 것이다. 그런 나이가 되어 자신들이 지난날, ‘ 돼먹지 못한 젊은이였던 날’에  행한 일에 대한 자괴가 지금부터 우리에게는 너무 안쓰럽고 마음 쓰인다. 품위 있고, 생각 깊고, 교양 있는 젊은 날일 수록 그 뒤로 아름다운 노년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준수 있었으면, 좋겠다. 점점 그런 노년의 세월이 길어질 징조는 우리 앞에 역연하게 보이고 있다. 

지금 70대도, 80대도 꽤 살만한 좋은 나이므로 그 세월이 보다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젊은 날을 소중하게 다스리기를 말해 주고 싶다. 그렇지만 여전히 낄낄거리며 성희롱 같은 우스개에나 취해 있는 이런 젊은이들에게 이런 낡아 빠진 담론이 들리기나 할까? 

하기야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그들도 알아서 하겠지, 우리 노인들도 자신의 앞 삶을 갈무리하는 노력은 멈추지 않으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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