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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Mar 23. 2018

Me Too는 Unfact일수도

Me Too는 unfact일수도

미투 운동은 대부분 남성들의 심정은 복잡할 것이다. 걱정과 분노와 냉소로 혼란스러운 심정인 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 번지고 있는 미투는 고금(古今)이래 우리사회 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없었던 광범위하고 갑작스러운 혁명인 것은 분명하다. 양성이 모두 당사자이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나 임전무퇴의 심정ㅇ로 하루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운동이 그렇듯, 미투 역시 ‘바람직한’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 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여성들이 수시로 겪는 실질적인 성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대책 없이 사회에서 외치고 있을 뿐이다. 고은이나 이윤택씨의  경우는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문단, 연극계)의 문제가 더 본질적이다.  만자(亡者)인 남성도 있고, ‘억울한’남성도 있다. 범죄의 성격과 경중이 같이 않기 때문이다. 남성사회의 가해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자 존중 및 반성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다. 일방적인 생각인지는 모르나 교활한 상습범은 숨어 있는 것 같고,  멋모르고 행한 ‘폭력적 애정행각’을 내세우며 진실을 감추려는 인상이 짙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별에 따른 성종속적인 관력과계는 없는 것이며 사실적으로 없다

권력이 형성은 성과 관계없이 여서이든 남성이든 특별권력관계로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젠더는 법적처벌이 어려운 사회적 모순이다. 공기처럼 작동하는 일상의 생활이기 때문에 탈법, 불법, 합법의 경계가 모호하다. 

영화계성폭력 실태조사와 지원단체가 설립되는 성과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한국사회의 흔한 적폐가 반복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문제는 ‘미투를 지지한’은 정부는 ‘사실상 무대책’에 가깝다. 사실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상담은  고도의 전문성과 다양한 대응을 요구하는 전문적인 중노동인 것은 명백하다. 정부는 

확실한 예방과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지원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이에 따른 예산도 병행 되어야 한다.

사회적 통념과 달리 미투로 인해 여성들의 미투가 줄어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은 숨겨진 범죄가 드러나 늘어나는 것일까? 미투는 남성사회의 윤리성 제고와 관계없이 무관하게 계속될 수 있다고 한다. 성 사건은 지구의 70%를 덮고 있는 바닷물의 양만큼이나 생이 있는 한 많이 같이 간다고 한다. 

문명 이래 가장 오래된, 가장 반발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굳이 나눈다면 가해자는 크게 두 종류다. 범죄인줄 알지만 처벌되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대담하게 저지를 이들이 있고, 그간  남성 중심적인 유교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용되어왔기 때문에‘정말 죄가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탈식민주의 이론에서는 권력이 허락한 무지(sanctioned ignorance),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모든 지식과 문화의 지위는 같지 않다. 외국어 능력에도 위계가 있듯,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고 “어떤 지식은 아는 게 힘이다” 남성사회에서 젠더는 무지가 당연시 되거나 심지어 자랑스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어떤 자는 여성정책토론회를 열어놓고 “나는 모른다.”  잠을 청하는 정치인이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걸 정인들은 성관계 당사자들은 유권자 대우도 못 받는다. 

지식의 의미는 권력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피임법은 남녀가각 다른 이유로, 무지의 영역이다. 문제는 이 의도적인 무지인해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무지가 곧 폭력인 경우다. 대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 가난한 지역에 관한 지식은 무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을 중산층인 증거로 삼는 이들도 잇다. 

미투로 인해 가장 충격을 받는 사람들은 아마도 ‘평범한’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차마 그 정도 수준인 줄은 몰랐으며, 그들 덕분에 자신이 “점잖은 분”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 로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하긴, 어느 누가 이 정도 규모로 성차별, 성폭력이 행하여지고 있는 줄 알았겠는가. 타인이 고통에 대해 음모론 운운하는 요즘 같이 이들에게 이들의 적폐는 그 발상도 발상이지만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성들의 실질적이고 진실한 피해를 조롱하거나 성차별을 사소한 문제 말하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상식적인 사람들은 “너무 몰랐다” “창피하다” “할 말이 없다” 고 말을 한다. 미투 운동은 폭력이 감소가 아니라 양서의 이해에 있다. 우리 인간의 현실에 대해 무지가 ‘무력’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여성들은 지금 한국남성들의 무지로부터 해방시키고 있으며 한국 남성이 근대화는 지금부터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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