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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Nov 07. 2018

중국음식을 먹으려면 으레 ‘쭝국집’ 이라는 된소리로 바름 하게 되는 길가의 작은 집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아니 굳이 생가이랄 것도 없이 몸에 익은 버릇 같은 것이다. 

아무 때라도 불쑥 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적당히 우중충하고, 적당히 비좁고, 또 적당히 불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꽃무늬 비닐덮개가탁자위 대충 깔린 그런 집이다. 탁자에건, 의자에건, 그 어디쯤에는 언젯적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라비틀어진 고춧가루가 한 두어 군데 붙어 있는 그런 곳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좀 마뜩찮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 주방이 바로 곁에 있는지라 얼마 가지 않아 그곳에서 슬슬 풍겨오는 냄새에 취하게 되고, 이내 앞에 놓이는 갓 된 요리가 뿜어내는 뜨거운 김만으로도 좀 전의 그 머뭇거림은 언젯적 이야기냐는 듯 행방불명이 되곤 한다. 

아마 그래서 꼭 된소리로 ‘쭝국집’이라고 발음을 하게 되는 그런 집이 골목마다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주로 “언제 한번 식사라도 함께합시다.”로 약속되어 가게 되거나, 무슨 이름이 붙은 날, 혹은 대접을 하거나 대접을 받는 일로 결정이 되어 가게 되는, 규모가 아주 크고 현대적이며 겁이 나도록  깨끗한 그런 ‘중국집’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그런 곳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대부분 나는 약속 날짜를 하루 이틀 전부터 소기 먼저 더부룩해지고 어쩐지 편안하지 못한다.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맛도 있고 괜찮은 집이라고 장안에 소문이 난 집일수록 내가 느끼는 부담은 더하다. 내게 그렇게 큰 부담을 주는 원흉은 행여 진한 국물이나 간장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앞서는 새하얀 식탁보도, 미니스커트 위에 구김살 하나 없는 앞치마를 꼭 액세서리라도 하나 걸친 양 살짝 두르고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서 있는 아가씨들도, 또 그렇다고 해서 줄을 빳빳이 세운 바지에 짧은 윗저고리를 입은 깔끔하게 보이는 그런 종업원들도 아니다. 

그런 것 들 중 상당부분은 “지금 세월이 어떤 세월인데”하며 내 쪽에서 알아서 기어서 길들어진 책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은 화성에서 왔수?“하는 눈초리를 면하게 된다는 것쯤은 매사에 형광등이라는 말을 듣는 나이지만 그래도 눈치로 안다. 문제는 그들이 꼭 음식을 각자의 접시에 배분해주고 가는데 있다. 매번 나는 그들이 내 몫이라고 나누어 주고 간 것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정 끝이나 제사를 지낸 후에 어머니가 “옜다, 이건 네모가치다,”하시며 손에 쥐어주시던 밤 몇 알, 곶감과 다식 두어 개 그런 것과는 다르다. 

평소 자신이 하는 일이 종류나 크기, 범위, 그 런에 나는 예민한 반응을 하는 편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마름질 할 때마다 될 수 있으면 치마폭을 좁게 하려는 지니고 있다. 자연히 “뛰어 보았자 벼룩”이라는 딱지가 붙어도 스스로 항의 할 염도  내지 못하고 수긍 반 체념 반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렇게 융통성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주제인지라, 그런 내가 먹는 음식의 종류나 양에서 뭐 그리 크게 벗어나겠는가?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새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금방금방 처리를 못해 식어 빠져 기름기가 엉킨 채 숨이 넘어간 ‘내 몫’의 음식들을 쳐다보아야 하는 것은 고역스럽기 짝이 없다. 임의로운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했을 때면 적당히 눈치보아가며 그 중 접시가 빨리 비는 쪽으로 슬며시 내 접시를 밀어 놓기도 하고, 어떤 요리 순서에서는 미리 말을 해서 내 접시를 놓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의 약속은 대부분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어려운 사람들끼리 만남이 되기 십상이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음식은 자꾸 뒤로 쳐지다가 마침내는 추한 꼴이 되어 퇴장 당하게 된다. 그런 몰골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부엌 속에 서있는 내가되어 “아깝다” 저게 얼마인데, 하고 아우성을 칠 지경이고, 소설 속이나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평생을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시들들 죽어 간 여인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여 불편하다. 그런 곳의 약속은 달갑지가 않게 된다. 

지난 달 하순 집안에 불행한 일이 있었다. 설마 하며 미련을 가지고 있었건만 한 가족이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몸속에 병을 알고 석 달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화기 차고 찬란해야 할 한창 젊은 나이에서다. 

슬픔이라고 하기 보다는 억장이 무너지는 폭탄이었고, 그 때 살아있다는 내가 한 없이 미워졌던 당시였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당시였다.   집안 한구석에 있는 한란 하 쪽, 마당에 심어져 있는 정원수들까지도 미워 보였다. 

그러나 대상을 알 수없는 마음과 원망으로 덧씌워진 내 눈에도 결코 그런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분들은 마지막 장례 날까지 우왕좌왕하는 우리 식구들을 대신하여 온갖 정성으로 일을 해 주었다 몇 명씩 조를 편성해서 해야 할 일을 분담해서 서로서로 돌아가며 .모두가 자기 일처럼 소매를 걷어 앞치마를 서두르는 것이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득그득 담긴 시장바구니들을 줄줄이 내려놓았고, 이 사람 저 사람들이 큰 상을 머리에 이거나 낑낑거리며 들고 와서 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안주를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시구들을 위해주고 섦에 방향으로 인도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망자의 친구와 친구 부인들이다. 부끄럽게도 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대부분 주부와 직장을 가진 젊은 남자들이다. 언뜻 볼 대 나이어린 자녀들이 있음직한 분들이다.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같이 상가에서 밤을 새는 것이다. 

저 분들의 가족은 어떻게 한다지?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 아무리 신앙의 힘이라고 들 하지만 저렇게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일이 쉬운 일일까? 저분들은 어디까지를 자기 자신의 일,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익을 챙기는 데는 남보다 한발이라도 먼저 달려가 자기 몫을 늘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니 궂은일에 서들어 나서서 남의 것을 스스로 제 몫인 양 등에 지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민망스러움에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장소에 선뜻선뜻 가지도 못하고 지낸 그 장례일 기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어딘가로 깊숙이 숨어버리고 싶고, 속 좁은 내 속내를 그들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에 다시 울고 싶다. 나는 ‘내 몫’이라는 것을 너무나 작게 정리하고 그 속에서 편안해지려는 겁쟁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으로 보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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