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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bin Park Jul 21. 2021

전주에서 서울로

스무살, 홀로서기

서울 살이의 시작.


'인서울'. 이 단어 하나만 보고 고등 시절 3년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1년 반이겠다. 고2 여름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인서울, 그게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뤄지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멈추는 것 마냥 커다랗게 보였고 불안했다. 다시 되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순간들의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거보니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스무살,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상경을 했고 첫 대학 기숙사에 합격했다. 


기숙사 합격 여부는 거리와 성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는데 성적은 잘 모르겠고, 내 고향 전북 전주가 꽤나 먼 덕분에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 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신입생때는 불편한지 모른채 지냈었던 남자 4인실 기숙사 방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아직 군대를 안다녀온 혈기왕성한 신입생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취업준비를 앞둔 4학년 선배가 하루종일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나가질 않는다는 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어'를 좀 배워보고 싶어서 글로벌 룸메이트 프로그램을 신청했더니 영어를 잘 안쓰고, 한국말을 '나보다' 더 잘하는 몽골, 중국, 일본인 학생들과 룸메이트가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는 낯선 도시, 서울 @Chanbn Park

기숙사를 나오기로 결심했다.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 이후 그간 지내던 기숙사를 나오기로 마음 먹었다. 위 세가지 이유뿐이냐 물으면 그건 분명 아니었고, 나만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전과는 달리 나는 점점 '어차피 집은 잠만 자면 되는 곳'이라는 말에 점점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사적인 나만의 공간이 없다보니 점점 마음 놓고 편히 지내야 할 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 기숙사 외 여러 옵션 중 가장 저렴한 옵션인 대학 근처 하숙집을 가장 먼저 알아보게 되었다. 다들 주변에 자취하는 친구는 많았는데 하숙집에 사는 친구는 정말 찾아보기 드물었다. 그만큼 대학 주변에 하숙집이라는 주거 형태가 점차 줄고 있는 추세이기도 했다. 


하숙집은 일단 저렴한 비용, 독립된 침실, 식사 제공이라는 어마무시한 혜택이 있어 선택했다. 학교를 걸어서 3-5분거리면 갈 수 있어 위치도 정말 좋았다. 다만, 막상 지내다 보니 바로 옆 방에 지내던 형님의 어마무시한 재채기 소리와 담배를 피고 들어오면 방 안까지 들어오는 담배 냄새, 화장실을 다같이 공용으로 사용하다보니 여러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후 조금 더 넓고 깨끗한 괜찮은 하숙집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첫 하숙집에서 지낸지 6개월만에 월세 5만원을 더 주고 이사를 가기로 했다. 부모님 연세와 비슷해 보이는 집주인 아주머니, 아저씨가 정말 친절하셔서 머무는 기간 내내 정말 편안하게 잘 사용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4학년 1학기, 나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리며 답답해하고 우울해했던 날들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졸업 전 운이 좋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회사 근처에서 생애 첫 월세 계약을 하게 된다.


목적지가 정혀져 있어 늘 안심이 되는 버스 안 @Chanbn Park


진짜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독립된 공간, '내 집'이 생겼다.


회사가 이태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태원에 살고 싶어졌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이태원역 근처는 아니고 경리단길 맨 꼭대기인 한남동(그랜드 하얏트호텔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언덕 길들을 출퇴근시 오르락 내리락하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부자일까' 하는 생각들을 매일 했던 것 같다. 


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삶을,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엄청 많구나 싶었다. 회사 근처는 너무 멀기도 해서 이태원역에서 조금 벗어난 '보광동'을 알게 되었다. 보물 같은 곳이었다. 비싼 동네에 저렴한 전월세 집이 많은 동네였다. 왜 그런가해서 찾아보니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하고 재개발이 예정이여서, 건물만 매매하고 관리를 잘 안해 전월세라도 그냥 싸게 내놓은 집들이 많다고 부동산 아주머니께서 말씀주셨다. 


사실 그렇다고 엄청 싸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을 앞둔 나는 모아둔 돈도 많지 않았다. 보증금, 월세 300에 30이 내 예산의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수중에 돈이 없었다. 보광동 주변 부동산 세네군데를 들락 날락하며 여러 집들을 방문하던 중 딱 한 곳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일단 방이 하나인 원룸이긴 한데 부엌과 거실이 나름 분리되어있고, 단독주택 2층에 창도 넓은 집이라 꽤 매력적이었다. 대학생때 타던 자전거를 보관할 공간도 있었고, 채광도 나름 잘되는 것 같아 한 두 번정도 더 방문해보고 바로 계약을 하기로 했다. 하숙집을 정리하고, 대학 주변 쏘카를 빌려 내 모든 짐을 실었다. 어떻게 혼자 이사를 했냐 물으면 쏘카 모닝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짐이 많지 않았었다. 이사 전 집 청소를 말끔히 하고 짐을 다 풀어보니 이 좁은 집도 다 못채울 정도로 짐들이 없었다. 역시 기숙사, 하숙 라이프의 장점은 가볍게 왔다 가볍게 가는 것 아니겠냐 싶었다.


이사 후 이튿날까지는 몰랐는데 3일째 되던 날, 이 집의 치명적인 단점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미용실 뒷편에 위치한 작은 우리 집에 미용약 냄새가 슬며시 풍긴다는 것이다. 상가 미용실 환기구가 우리집 신발장으로 넘어온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그때 깨닫게 된 것이다. 이사 전 체크리스트 등을 인터넷으로 확인해서 나름 꼼꼼히 본다고 봤었는데 집의 가장 첫 관문인 출입구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속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이 우리집에 찾아오셨다. 아들의 생애 첫 자취방이라 그런지 내심 걱정반 기대반이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젊어서는 고생해도 되고, 조금 좁고 불편하게 살아도 다 견딜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나에게 많이 해주셨었다. 그러셨던 분이 집에 들어서시자마자 미용실에서 풍기는 약품 냄새 때문에 도저히 이 집에서 더는 오래 묵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딱 한 두달을 더 지내다 LH 전세자금 대출을 신청하여 운좋게 전세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 8,000원만 예산에 구할 수 있는 집 옵션이 많이 없었으나 보광동 위에 위치한 '우사단길'에 저렴하고 넓은 집이 많아 계약하기로 했다.


그렇게 미용약품 냄새 가득한 내 첫 원룸 집과 작별 인사를 했다. 


꽃무늬 벽지와 약품 냄새로 고생했지만, 그래도 넓은 창에 채광이 좋았던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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