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태도였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발견한 무엇

by 젼정

'아쉬워, 아쉽단 말이지.'


'서울국제도서전'을 보러 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그곳에 갈 만큼 책을 좋아하는가, 누구랑 같이 갈 것인가, 시간을 어떻게 낼 것인가 등등, 여러 가지 고민은 나를 '가지 않는다'의 코너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 일요일 아침을 먹기 전까지는.


그렇게 마음을 정해놓고도 이상하리만치 계속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가자!"


아쉬움을 남기는 게 싫어서 단번에 마음을 바꿨다. 쓸모 없어진 고민은 스쳐간 바람처럼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가기로 정했으니 같이 갈 사람에 대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모처럼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이제 가을이 오는구나 기분을 한껏 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낮의 볕은 뜨거웠다. 오래간만에 아이와 지하철을 탔다. 코로나 유행 이전에는 가끔 아이와 서울에 가서 뮤지컬도 보고, 전시도 보곤 했었다. 힘들 걸 알면서도 나선 수많은 외출에서 우리는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지하철이 출발했다. 언제 가나 싶었는데 어느새 지하철은 다리 위를 건너고 있었다. 당산역에서 합정역을 지날 때, 나는 아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하철에서 찍은 사진(합정과 당산 사이)


"저거 봐."


아이는 돌아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린다. 이 구간을 지날 때만큼은 늘 휴대폰을 멈춘다. 확실히 보이는,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모든 것이 평온하게 느껴진다. 이 순간만큼은 지구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다.


드디어 성수역에 도착했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나는 저런 옷을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라고 생각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짙은 파란 바탕에 쨍한 연둣빛 동그라미들로 우리를 맞이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웹툰 전시에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이는 집에서 자주 보던 조석의 '마음의 소리'를 알은체 하며,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전시가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에게는 좀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웹툰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기 자신이 보는 것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산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내 그렇게 된다. 그러다 더 넓은 세상을 발견할 때, 생경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드넓은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나는 나를 깨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얼마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전시장은 꽤 붐볐다. 국제도서전답게 사람도 많고, 글자도 많으니, 아이는 그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쉬웠지만 예상한 전개였으므로 나는 미련 없이 전시장을 빠져나와 다른 동으로 향했다. 창고 같이 보이는 곳에 출판사 부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이라기보다는 '성수도서판매장'의 느낌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구나.


대형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도 책은 얼마든지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보면 '책'의 인기는 세월이 지나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존재일 것만 같다. 그곳에 다양한 출판사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우아하게 책을 고르는 건 불가능했다. 책을 책답게 구경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대체 여기에 왜 왔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행사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어떤 출판사 직원은 녹초가 된 얼굴로 이 행사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그런 얼굴로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해한다. 사람이니까, 힘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도 그 사람이라면 그랬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 책을 열심히 설명하고, 홍보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친 건 마찬가지일 텐데 태도는 제각각이었다.


"이거 만들어 볼래?"


부스를 혼자 지키는 출판사 직원이 지나가는 아이에게 종이로 만드는 주방놀이를 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고, 그곳 출판사 책이 우리 집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반가워했다. 판촉물에 낚인 우리는 이어지는 친절함에 스르륵 지갑을 열었다. 제법 두툼한 책 한 권이 빈 가방에 툭 자리를 잡았다.



"이 책은 풀꽃으로 만든 책이야. 한번 볼래?"


한 여자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아이에게 책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다른 분이 이렇게 말했다.


"이 책 쓰신 작가님이세요."


작가님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마스크를 쓰고 계셨지만 그 미소가 느껴졌다.


"아, 정말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책을 사기로 했다. 작가님은 그림책에 대한 짧은 설명과 함께 사인을 해주셨다. 나는 아이에게 이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이에게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다. 집에 돌아와 '비야, 그만'이라는 그 그림책을 읽었다. 풀꽃 그림책에는 다양한 꽃누르미를 활용한 그림들이 있었다. 자연을 고스란히 담은 그림책이었다. 그림책 마지막에는 책에 등장하는 풀, 꽃, 잎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가님의 친절한 음성이 다시금 떠오르는 페이지였다.


결국은 태도였다.


집에 돌아와 '태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쓰고, 만든 책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나아가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태도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좋은 책이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을 소개하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의 태도가 적절하지 않으면 관심도가 떨어진다. 혹자는 그것을 그저 마케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 책을 쓰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태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책에 담긴다.


살살거리면서 '이 책 한 권 사주세요'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건성인 태도로 파는 책,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만든 책, 겉표지가 같은 두 책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결국 나는 파는 책이 아닌 만든 책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그곳에서 본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울국제도서전'이 내게는 다소 아리송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아리송하니 내년에도 가야 하나, 아쉬움에게 그 대답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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