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급 노트북으로 즐기는 타자 게임
가파른 언덕 위 빨간 지붕 2층 집, 그 집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하늘과 닮은 바닷가 마을 언덕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집과 그곳에 사는 누군가를. 저 집 양동이에는 포뇨*가 사는 게 아닐까. 명랑함을 어깨에 얹은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언덕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펼쳐진다.
한때는 내 뱃속이 어항이 되는 상상을 자주 했다. 날치알밥을 볼 때마다 뱃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림으로 그린 적은 없지만 나는 그 이미지를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 그럴 리 없는 일들을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하는 건, 그걸 말할까 하다가 대부분 말하지 않는 건, 이제 습관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지구에서 어떤 존재일까. 무수히 찍힌 점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지구에서 그저 우리는 존재 가능한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를 모를 행성에서도 지구를 염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이름 모를 어디쯤에서.
얼마 전 목에 로션을 바르면서 닭 모가지 조각을 아무 생각 없이 뜯어먹었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도 목이 있으면서 닭에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나는 그런 짓을 수없이 해왔다. 그런 수많은 공상과 몽상은 대부분 다락에 몇 년째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처럼 사용되지 않고도 계속 머릿속에 존재했다.
여름의 한가운데 즈음,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를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 나는 그녀를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옷가게를 운영했고, 그곳은 우리 집에서 도보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가 가게를 운영한다기보다는 그녀 자체가 걸어 다니는 그 상점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다가 상당히 많은 부분 '우리의 좋아요'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거기까지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취향이라는 건 당연히 '좋아요'가 생기는 그런 것이니까. 오히려 그다음 사실이 놀라웠다. 어쩌다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안에 분명 색은 달라도 결은 같은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알아가기 위한 대화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기에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괜찮은 말을 고르기보다는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은 대화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그런 말들을 참아왔는지 대단하다고 여기질 정도로 우리는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녀는 어느새 나를 '작가'라고 불렀다. 내가 나를 그렇게 칭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내게 '작가'라는는 명사를 사용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와 비슷한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많겠지만 이토록 수많은 교집합이 가능한 사람은 처음 본다. 생각지 못한 곳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느낌도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찾을 수 없는 숨바꼭질 같은 관계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이건 친한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또 결이 다르다. 실제로 만나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옷을 샀다. 남편은 가서 구경하고 사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의 ‘사이버 우정’을 좀 더 지키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전날 방문한 빈티지 가게에서 쇼핑을 할 목적이 있었기에 쉽게 내 부탁을 수긍했다.
이것은 역시 생소한 옷 사기 방법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옷을 미리 준비해 달라고 한 다음, 계획한 대로 남편을 보냈다. 그렇게 약간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방법으로 주문한 옷이 내게 왔다. 종이 쇼핑백에 적힌 '젼정님. 낭만 가을, 사이버 우정에 맞는 남다른 표시' 문구를 보며 ‘헤헤’ 거리는 나를 보며 남편은 상당히 웃겨했다. 파란색 카디건과 양말들은 정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옷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고, 나는 또 다른 옷을 그녀에게 주문했다. 그 사이 우리 사이에 더 많은 단어와 문장으로 만든 상상들이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였다. 옷을 주문하기 전부터 그녀는 내게 자신이 만든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다. 드디어 내가 주문한 옷과 그녀가 만든 선물이 내게 왔다. 내가 주문한 옷을 그녀는 ‘블루’라고 칭했다. 그랬다. 공교롭게도 또 블루였다.
나는 언젠가 그 ‘블루’를 단독주택 마당에서 입고 싶다고 말했다. 그 옷을 입어보니 꼭 그런 마당에 어울리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은 없지만 그런 옷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녀는 자신이 그리는 단독주택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세컨드 집에 심고 싶은 나무를 내게 말해주었다. 그건 바나나 나무였다. 난 여태껏 집 앞에 바나나 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럼 나는 블루를 입고 마당에 앉아 최고급 노트북으로 타자 게임을 하겠다고 했다. 끝으로 갈수록 속도가 빨라져 손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는 그 게임처럼 지금 우리의 대화가 그렇다고도 했다. 당장 우리에게는 단독주택도, 바나나 나무도 없었지만 우리의 말들은 신나게 낙하하며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한메타자교사*의 끝에는 늘 엉망진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난 늘 단순한 그 게임을 좋아했다. 고양이 단편만화에서 뜨개질 실이 엉망이 된 걸 보고 좋아하는 나는 그때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좀 다르게 입었다. 패턴이 없고, 편견이 없는 코디였다. 무엇이 포인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평소 옷을 고를 때 적당히 튀지 않는 것을 골랐고, 일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골목 귀퉁이마다 숨어 다니면서 집에 귀가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대체로 자신이 없었고, 그런 상태가 들통나는 게 두려웠다. 나는 나를 구겨진 종이처럼 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옷을 선택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닐 때 가끔 부흥회에 참석했다. 부흥회 때는 다른 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고, 평소보다 더 크고 세게 찬송가를 불렀다. 은혜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 이제 난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어쩐지 그녀와의 대화는 그 부흥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누군가와 친해지지 못하고, 친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내가 만난 적 없는 이와의 대화에서 은혜로움을 느끼다니.
우리는 나중에 어떤 집에 살게 될까. 난 내가 단독주택에 맞는 사람인가 고민했지만 그녀는 ‘어렵지만 맞지 않는 건 아니다’, ‘맞지만 어려울 수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내게는 그런 확실한 말이 필요했다. 그 말은 내게 어렵지만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어쩌면 우리가 친구나 가족, 오다가다 알게 된 사이가 아니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대화를 나눈다. 내 곁에 있는 이들과 나눈 수많은 말들이 말풍선처럼 내 머리 위를 떠다닌다.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담아 우리는 ‘다음’에 또 이야기를 나누고, 만난다. 소진되지 아니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을수록 충전되는 대화를 우리 모두 맘껏 나누었으면 한다. 그녀의 말대로 어렵지만 할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 받았다. 나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목걸이를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구름, 하늘, 물 그리고 귀여움이 담긴 목걸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니 몸이 잠시 간지러울 정도로 찌릿해졌다. 내가 그런 사람인가 생각하며 저 목걸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블루'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이 관계를 무엇이라 불러야 될지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이와 나눈 말들이 내게 와 위로가 되고, 행복이 되었을 때의 생경한 느낌, 이 낯선 감정들을 한데 모아 보고 싶었다. 모든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노력해도 붙잡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시간을 쌓아 나간다. 그 시간들이 되도록 천천히 우리에게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의 하늘빛 웃긴 우정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처럼 천천히 어디로든 나아가길 나는 기다린다.
블루, 이 옷을 입고 단독주택 마당에 앉아 최신식 노트북으로 타자 게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녀의 집 앞 바나나 나무를 지나면서 오늘을 떠올려본다. 킥킥. 역시 이 다양한 파란색 우정은 웃기다.
* 포뇨 : 벼랑 위의 포뇨(일본영화, 2008년)에 나오는 호기심 많은 물고기 소녀
* 한메타자교사 : 1989년부터 2003년까지 한메소프트에서 DOS/Windows용으로 발매한 PC용 타자 연습 프로그램 / 참고 https://namu.wiki/w/%ED%95%9C%EB%A9%94%ED%83%80%EC%9E%90%EA%B5%90%EC%82%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