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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Dec 20. 2021

오징어 내장 사건

전업주부를 빠른 속도로 불쾌하게 만드는 법

귀여움과 멀어지며, 슬퍼져 가는 와중에 오징어 내장 사건이 발생했다. 바지락을 듬뿍 넣은 순두부찌개와 구운 김, 오이무침을 번갈아 가면서 입에 넣고 있을 때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집 근처에서 오징어를 샀으니 받으러 내려오라는 전화였다. 엄마랑 우리 집은 도보 3분 이내 거리에 있다. 모처럼 혼자 아침식사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손질된 오징어야?"


내가 물었다.


"아니."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엄마의 목소리가 내 귀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입안에 담긴 음식들을 억지로 삼키며 다음 말을 생각해냈다.


"오징어 손질하기 싫은데."


마트에서 오징어를 살 때면 눈까지 다 떼서 손질해달라고 부탁하는 나다. 언제였던가. 내가 거절할 새도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엄마가 주꾸미를 준 적이 있었다. 머리 부분만 손질하면 된다는 말에 나는 의심 없이 주꾸미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인터넷으로 손질하는 법을 찾아보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바로 손질을 시작했다. 전업주부의 가면을 쓰고, 자신만만하게 칼을 들었다. 그때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비명이 시작되었다.


"으악! 악! 악!"


생전 본 적이 없는 흐물거리는 것들이 주꾸미의 동그란 머리 안에서 흘러나왔다. 미끄덩거리는 머리 안에 들어 있는 주꾸미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보기 싫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주꾸미를 손질하지 않았다. 어쩌다 먹게 되면 먹는 일은 있었어도, 적극적으로 주꾸미를 찾지는 않았다.

오징어에 눈이 달려 있는 경우도 비슷했다. 내장을 손질해달라고 해도 눈은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오징어 눈 근처를 칼로 도려낼 때의 괴상야릇한 느낌이 싫었다. 살아있었던 것들의 눈을 마주하는 일은 늘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지 못하는 그 일들을 업으로 삼는 분들을 늘 대단하게 생각한다.


"집에서 놀면서 그것도 못 해?"


엄마가 좀처럼 하지 않는 말로 나를 쏜다. 전업주부를 빠른 속도로 불쾌하게 하려면 이처럼 말하면 된다. 조금이라도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나처럼. 엄마도 전업주부면서 나를 공격하다니 불쾌감이 배가 된다. 오징어 내장을 손질하지 못하는 사람은 갑자기 이렇게 공격받아도 되는 건가? 전업 주부는 꼭 오징어 내장을 손질할 줄 알아야 하고, 손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따져 물으면 엄마가 속으로 '쟤가 집에서 놀더니 이상해졌네.'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한다.

엄마는 까만 봉지를 열어 이렇게 크고 좋은 오징어를 싸게 샀다면서, 그것을 해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다. 나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마스크 안에 숨기고, 오징어의 싱싱함을 자랑하는 엄마의 말을 최대한 흘려들었다.


"다음부터 이런 거 사지 마."


'이런 거'는 '내장이 손질되지 않은 오징어'를 뜻한다. 아예 사지 말라고는 하지 않고, 이런 거라고 말하는 내가 좀 없어 보이나 싶기도 하다. 엄마는 나를 '집에서 노는 애'라고 하면서 덧붙여 '오징어 손질도 못하는 애'로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참여한 책도 나왔고 말이다.

엄마한테 말해주면 '집에서 놀면서 글도 썼어?' 하면서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는지 궁금해하려나. 까만 봉지 안에 든 싱싱하고 큰 오징어만 생각하면 마음이 자동으로 삐딱해진다.

이 사건을 남편에게 말해주니 대수롭지 않게 '저녁에 내가 가서 하면 되지.'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 날 다그쳤다면, '집에서 노는 애'라는 말에 조금이라도 동조했다면 했다면, 나는 정말 오늘 집에서 놀면서 (눈물을 닦느라) 휴지도 많이 쓰는 애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업주부로 살면서 '집에서 노는 애'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 깊숙이 숨겨둔 줄만 알았던 자격지심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른 자격지심은 여기저기 떠다니면서 나를 괴롭힌다. 그것은 전업주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결핍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가끔 아이가 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표현할 때도 나는 발끈한다. 아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꼭 한마디 보탠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전업주부연합회에서 너의 그 발언,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자신 있게 외치긴 하지만 애초에 그런 단체는 없기에 나는 이내 목소리를 낮춘다. 나는 오징어 내장 손질을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못한다기보다는 하고 싶지 않다. 살아 있던 생명체의 얼굴과 속을 직접 분리하는 순간이 내겐 견디기 힘든 공포다. 생선을 씻다가 눈을 만지게 되는 순간에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하다가 익숙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남편이 오징어 내장 손질을 해결해준다고 조건으로,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치킨으로 정해졌다.


"치킨을 먹고 오징어 내장을 손질해주지 않으면, 먹은 것을 다 내뱉어야 할 것이야."


나는 농담과 함께 그의 귀가를 반긴다. 남편은 해줄 것이다. 로맨틱한 이벤트는 없어도,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무엇이 없어도, 내가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늘 그런 부분에 있다. 나는 오징어 요리 대신, 오징어로 글을 써보았다. 엄마가 내게 건넨 요리 재료는 내 글감으로 둔갑했다. 오징어가 진정한 오징어볶음으로 식탁에 위에 올라가면 이 글도 먹음직스럽게 완성시켜야겠다.




                 오징어는 이처럼 잘못이 없다.  


내 분노와는 관계없이 오징어는 맛있었다. (어쩐지 실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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