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젼정 Dec 17. 2021

금요일 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

얼마나 기다린 주말이었는지 금요일 밤부터 기분이 좋았다. 금요일 밤은 알맞게 탄력을 잃은 고무줄 바지와 적당히 늘어났지만 촌스럽지는 않은 티셔츠를 입고 나를 반겼다. 금요일은 평소보다 많이 먹어도 소화시킬 시간이 충분하다.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담이 없다. 밤늦게 영화를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술을 평소보다 좀 더 마시는 것도 다 된다. 평일에 하지 못했던 일들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토요일에 아무 약속도 없다면 그 마음은 더 포근해진다.

이런 들뜬 마음을 더 증폭시키기 위해 나는 아이와 이런저런 구색을 맞추지 않고, 최대한 대충 입고 집 앞 슈퍼로 향했다. 금요일이니까, 그런 기분을 유지하면서 신중한 협의를 거쳐 과자를 담고, 특별히 살 건 없지만 무엇이라도 사도 되는 기분으로 그 안을 누볐다. 나는 맥주 코너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작년부터 ‘역시 테라!’라고 칭찬하며 마셨던 수많은 순간들을 배신하는  씁쓸한 기분을 클라우드 두 캔과 함께 장바구니에 담았다.


여름이면 캄캄하지 않았을 시간이었을 텐데,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가을은 헤어지는 마음을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슈퍼를 나오자마자 아이는 습관처럼 자그마한 손을 내게 내민다.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나머지 손으로 기꺼이 아이의 통통하고 부드러운 손을 잡는다. 이런 기분이라면 한 걸음에 그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아무 말이나 순서 없이 내뱉는다. 익숙한 길에서 낯선 이들의 모습을 스친다. 아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나를 앞서 달린다. 나도 그 뒷모습을 보며 속도를 낸다. 그렇게 우리는 금요일 밤을 함께 가로지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귀여움을 곁에 두어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