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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an 17. 2022

실패가 필요하다

완성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할 수 없는 순간

얼마 전 뜨개로 만든 바라클라바(방한모)를 다 풀었다. 실에서 모자가 된 그것은 또다시 실이 되었다. 완성된 것을 없는 존재로 되돌리는 일은 어렵다. 과정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남겨두는 것들도 있다. 

바라클라바는 내 예상보다 작게 만들어졌다. 내가 쓰진 못하더라도 초등학생인 딸아이에게는 적당한 크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으로 아이가 바라클라바를 싫어했다. 얼굴에 착 붙는 바라클라바가 아무래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완성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 내게 도착했다. 아쉬운 마음에 바라클라바의 작별 사진을 찍어두고, 결국 나는 꼼꼼하게 숨겨둔 실의 끝을 찾기로 했다.


모자가 완성된 후의 기쁨으로 숨겨둔 실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이야.


지리멸렬한 시간이다. 실이 아무렇게나 풀리고, 뒤엉킨다. 그 와중에 영화를 틀어놓고 보기까지 하는 내가 어이없게 느껴진다. 손과 정신은 실뭉치에 가 있으면서도, 힐끔힐끔 영화를 보는 내 심리 상태는 엉킨 실만큼 복잡한 것임이 분명하다. 영화 드라이 마르티나가 끝나고, 영화 보이후드에 나오는 메이슨이 새아빠네 집에서 탈출하는 장면쯤에서 실은 동그랗게 정리가 끝났다. 


내가 바라클라바였던 적이 있었어?


동그란 실이 말을 건넨다. 뜨개를 하는 과정에서 결과물을 기대하던 내 마음이 떠오른다. 완성된 바라클라바를 아이에게 씌워주며 환희로 가득 찼던 그날 밤공기의 흐름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든 완성했으니 쓸모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내 마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고개를 떨군 화사했던 꽃처럼 볼품없이 시들시들해지고야 말았다. 

글을 쓰면서도 이런 기분을 자주 느끼고 있다. 시작하기 전에 비하면 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완성되었다는 하나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쓸모없는 모자처럼, 내 글이 그렇게 남겨진 건 아닌가 스스로를 되짚어본다. 우리는 누군가의 결과를 보는 일에 익숙하다. 아무리 그 과정이 힘들었다고 말해도, 내 눈에 보이는 건 그들이 내어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타인의 결과물은 쉽게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운이 좋아서, 시대를 잘 타고나서,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면 쉬워진다. 묘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나를 그저 '불운'할 뿐이라고, 그렇게 두둔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모질게 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모질게 굴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기 자신을 싸고돌다 보면 모든 잘못을 외부에서 찾게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많은 감정을 겪어야 한다.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그 감정은 언젠가의 나에게 더 깊이 파고들고야 만다. 기쁨을 더 기쁘게, 슬픔을 더 슬프게, 아픔을 더 아프게, 절망을 더 절망으로 몰아넣는 우리의 삶은 깊어질수록 더 영근다. 껍질 안에 있는 알맹이가 자신을 스치는 계절에 담긴 모든 것을 만나 여무는 것처럼 우리도 그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한 번에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고 착각도 했다. 그러나 모자는 다시 실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자를 만든 과정이 몽땅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실패를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체로 매끄럽게, 잘 완성된 것을 갖기 위해 돈을 낸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실패가 필요하다. 우리가 돈을 내고 사는 것에는 실패도 포함되어 있다. 더 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실이 뭐가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내 글도 무엇이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이 되긴 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시작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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