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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an 24. 2022

사는 건 다 그렇지 않다

난 별일 없이 산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힘든 상황을 일시적으로 위장하기 위해 하는, 그 말이 싫다. 어떤 일이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단련된 상태에서 그 말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일들을 뭉뚱그려서 별 일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당장은 편하다. 모두가 그런 삶을 살 거야,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힘든 일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다 그렇지 뭐.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 그렇지가 않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길 바랄 뿐이다. 사는 건 다 그렇지 않다. '살고 있다'의 존재로써는 같을지 모르나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때로는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어떤 이들은 내가 불행에 빠지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군다. 내가 세상을 향해 투덜거리면 '결국 그럴 줄 알았어.'라는 어조로 나의 불행이 더 커지도록 소매를 걷고 거든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그 안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그 어떠한 행복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진다. 가끔 누군가 나의 삶이 부럽다는 식으로 말하기라도 하면, 나는 곧장 내 표정에서 행복을 덜어낸다. 내 행복이 상대에게 상대적 불행이 되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기약 없는 행복의 모습을 들키는 것이 싫어서이다. 그렇게 나는 적당히 불행을 안은 얼굴로 삶을 유지시킨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 가사 중에서


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 노래 가사를 좋아한다. 유치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가사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불행이 늘 잔존할 것이라고 믿는다. 잔존하지 않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게 믿는 것이, 예상하는 것이 내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불행의 크기는 상관없다. 나와 같은 불행이라고 안도할 수만 있다면.

장기하가 부르는 야무진 노래 가사처럼,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사는 게 즐거운 이들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따금 뾰족해진다. 내가 잘 지내지 않는 순간에는 더 그렇다. 네가 잘 지내길 바란다고 말하면서도 나만 불행해지는 것은 싫은, 인간의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어떤 날은 그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고 싶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 노래를 들으면 약이 바짝 오른다.


정말 별일 없이 산다고?

사는 게 즐겁고, 재밌고, 신난다고?


역시 사는   렇지가 않은 거다.  비슷하게 산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반면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삶을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삶을 소유할  없다. 삶은 언제나  자리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감각으로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은 누구에게 안겨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불행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자위하는 삶은 스스로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나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내 삶에 존재할 것이라고, 그것들을 해내며 사는 사람은 분명 다른 삶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애석하게도, 사는 건 다 그렇지 않다. 요즘 나의 삶은 노래를 부르는 쪽에 가깝다. 당신의 삶도 그러하기를, 선명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러본다.


난 별일 없이 산다. 사는 게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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