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 펜 끝의 작은 강철 알이 펜의 움직임에 따라 돌면서 오일 잉크를 내어 쓰도록 된 필기도구.
- 네이버 국어사전
볼펜 하면 사쿠라 볼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학창 시절 친구와 문구점 펜 진열대를 구경하는 것은 소녀들의 필수 코스였다. 싸구려 지갑 안에 든 돈의 존재를 몇 차례씩이나 확인하며 신중하게 선택된 볼펜은 며칠간은 필통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새 볼펜은 새하얀 종이 위에서만 사용될 수 있었다. 그 귀한 대접도 삼일 정도 지나면 끝이었다. 새로운 볼펜이 나타나면 이전 볼펜은 그저 쓰던 볼펜이 되었다. 익숙해지면 소중한 적이 있었는지도 아득해진다. 볼펜 입장에서는 참 야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볼펜은 학생에게 사치품이기도 했다. 꼭 필요하지 않아도 깔 별로 필통에 넣어두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우리는 문구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사지도 못할 볼펜을 한참 테스트 종이에 썼다.
안녕. 잘 써진다. 사고 싶다.
아무 말이나 썼다. 볼펜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볼펜은 가늘고, 굵은 물결과 함께 그 종에 위에서 춤을 추었다. 자기 자신만의 방식대로 대답을 해준 셈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 남는 불펜은 문구점에서 산 볼펜이 아닌 타인을 조르고 졸라 얻어낸 볼펜이다.
검은색 사쿠라 볼펜.
단정한 머리, 하얀 피부, 긴 속눈썹,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나게 옷걸이가 좋은 남자아이의 주머니에서 나온 볼펜이 떠오른다. 여자 손가락 한 뼘 남짓한 볼펜이 그날따라 내 눈에 탁 들어왔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볼펜이었다. 볼펜에는 알 수 없는 일본어가 적혀 있었다. 그 아이는 그 있어 보이는 볼펜으로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종이 조각에 적어주었다. 지금이야 이메일에 광고 메일만 오지만 그 당시에는 친구들과 이메일을 자주 주고받았다. 휴대폰이 없었기에 메신저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검은색 볼펜은 그 아이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안에서 작게 흔들렸다. 흔들림이 정지되고, 볼펜은 다시 침묵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이거 나 줘!"
나는 뻔뻔스럽게 그 아이에게 볼펜을 요구했다. 남자아이는 단번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 그랬을까. 갑자기 그 볼펜이 갖고 싶었다.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갑자기 볼펜을 달라고 요구하는 나로 인해 그 아이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나는 그 아이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아주 천천히 친해졌다. 나는 그 아이와 마주칠 때마다 볼펜을 내놓으라고 하며 제법 귀찮게 굴었다. 그 아이는 정확하게 '안 돼'라고 말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볼펜'이라고 되받아쳤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볼펜은 내 손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처럼 굴었지만 분명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미소가 바다의 윤슬처럼 광대와 입가를 수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내 것이 된 검은색 사쿠라 볼펜은 더 이상 그냥 볼펜이 아니었다. 그 아이의 손가락 안에서 작게 흔들리던 볼펜은 결국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나는 그 볼펜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면서 알게 되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요구한 것이 볼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아이가 준 볼펜을 한동안 나는 소중히 간직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볼펜은 소중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서야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볼펜에 담긴 마음이 나와 비슷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볼펜을 달라고 조르는 순간, 그 아이는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볼펜이 나한테 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주고 싶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는 메일 속의 그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나는 문구점에 가면 볼펜 진열대 앞을 기웃거린다. 때때로 볼펜을 보면 그 순간 그 아이의 얼굴에 머물렀던 미소가 내게 와 스친다. 그 미소를 이제야 꾹꾹 눌러 담아 써본다.
마음 같아서는 솔직히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마음의 단어 수첩>
볼펜 : 상대의 마음을 확인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