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 많은 사람이 함께 타는 대형 자동차. 보통은 운임을 받고 정해진 길을 따라 운행하며, 시내버스, 시외버스, 관광버스, 고속버스 따위가 있다. / 네이버 국어사전
버스는 정해진 길로 간다.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은 안전하게 느껴진다. 정말 그럴까.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사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일은 버스 밖 침입자로 인해 버스 안에서 생긴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날은 엄마가 일하는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에서 버스로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봄과 여름 사이를 지나는 버스 밖 풍경은 꽤 괜찮아 보였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버스를 탈 때부터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버스 창문은 꽤 컸다. 활짝 열면 제법 오픈카 느낌도 났다. (오픈카를 타본 적은 없지만 이 문장을 꼭 끼워 넣고 싶다.)
인도에 늘어선 가로수와 익숙한 간판들. 그 풍경들은 영화의 따스한 한 장면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두 장거장 후면 나는 다른 장면으로 발을 내디뎌야 했다. 하차벨을 누를 타이밍을 기다리며 나는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면 바깥세상과 닿을 수 있는 버스 안에서 나는 평화로운 오후를 즐겼다. 역시 약속된 것처럼 차가 막혔다. 그냥 지나가면 신기할 정도로 늘 막히는 구간이었다. 버스는 꼼짝없이 그 길에 갇혔다. 그때였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가 성큼성큼 버스 바깥에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설마? 아니겠지?'
쓰윽.
낯선 남자가 내 뺨을 만지고 지나갔다. 때린 것도, 꼬집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치듯 만졌다. 무표정이었다. 웃음도, 분노도, 슬픔도, 장난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확실히 경험했다. 그 남자는 유유히 사라졌다.
유유히, 유유히.
남자가 사라지자 두려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가 다시 되돌아와 내가 탄 버스에 올라타진 않을까. 내 얼굴을 기억해서 언젠가 마주치게 되진 않을까. 괴로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버스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버스가 빨리 떠나기를 나는 기도했다. 그 남자와 더 멀어져야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분명 의도적으로 내게 걸어왔다.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버스 밖에서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의 뺨을 실수로 만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버스 창문이 조금만 덜 열려 있었더라면, 내가 버스 뒤쪽이 아닌 앞쪽에 앉아 있었더라면, 내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버스 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나와 그 낯선 남자만이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결코 로맨스가 될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은 그렇게 대본도 없이 촬영되었다.
긴 두 정거장이 지났다. 나는 뜨거운 물에 오래 데쳐진 나물처럼 흐물거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엄마가 보였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로 나는 엄마 곁에 섰다. 그 일을 내가 엄마에게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 그건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기억하기 싫은 장면이라는 건, 참 당혹스러운 일이다. 한동안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떠올렸다. 활짝 열어놓은 버스 창문으로 침입한 낯선 이의 손을.
어제도 아이와 버스를 탔다. 캄캄해진 하늘에 반짝이는 간판들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꽤 괜찮은 저녁이었다. 하차벨을 누르고, 나는 아이와 함께 바깥세상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버스는 정해진 길을 간다. 가는 길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어제 아이와 나란히 앉은 버스에서 나는 두려움이 아닌 다정한 마음만을 느꼈다. 그 길에서 얼마만큼 왔을까. 우리의 삶이 버스라면, 예상할 수 없는 하루에서 오늘도 무사히 잘 하차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마음의 단어 수첩>
버스 : 결코 로맨스가 될 수 없는 인생의 한 장면을 대본도 없이 촬영한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