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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n 02. 2022

비 오는 날

1.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을까. 비가 제법 내리는 날이었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에 던져놓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한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었다. 동네 친구(이름이 은영이었던가)와 나는 골목 구석에 자리를 잡고 우산집을 만들었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기억에 미뤄보면 계절은 초여름쯤으로 짐작된다. 바닥에 펼쳐놓은 두 개의 우산 안에 들어가 우리는 목적도, 형식도 없는, 이름 없는 놀이를 했다. 지붕인 우산 표면에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후두둑. 후두둑. 


작은 우산집을 가득 채우는 빗소리에 나와 친구는 이유 없이 웃었다. 우리는 바닥에 작게 파인 웅덩이에 고이는 빗물을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며 장난을 쳤다. 비 오는 날 우산 안에서 노는 우리를 나무라는 사람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다. 차도, 사람도 그저 그 골목을 스쳐 지나갔다. 젖은 신발에 온몸을 싣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여러 번 접어놓은 종이처럼 몸은 그 자세를 기억하게 되었다. 집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을 텐데, 굳이 밖에 나와 우산 속에 숨어 노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나와 친구가 그 우산 안에 들어가 있었는지, 야속하게도 그 마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빗물에 씻겨 사라진 마음을 가만히 불러본다. 


평일 오후, 우리 집이나 친구네 집이나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 계시지 않았다. 학원도 그 시기 형편에 따라다니다 말다 했던 터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저녁 먹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이가 혼자 나가노는 일이 드문 일이 되었지만 그 시절에 흔한 일이었다. 그때는 어린이 나름대로의 자유가 있었다. 집집마다 차이는 있었겠지만 집 앞에 나가 노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비 오는 날에 우산집에서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어떤 시간을 거쳐 그 순간이 지금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2. 

얼마 전 초등학생인 딸아이의 하굣길에 비가 애매하게 내렸다. '그 정도라면 맞고 와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우산집 안에서 놀던 나의 비 오는 날의 추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아이에게 오늘은 비를 맞고 오거나 친구의 우산을 같이 쓸 수 있으면 부탁해서 같이 써보라고 했다. 우산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아이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왔고, 나는 우산 없이 비 오는 날을 맞이한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다. 


"집에 오는 길 어땠어?"


"너무 싫었어!"


'어라? 예상 밖이다.'


"시원하지 않았어? 재미있지 않았어?"


"전혀! 친구랑 같이 쓰는데 우산이 작아서 자꾸 한쪽 어깨가 젖었다고. 학교에서 우산 빌려주는 게 있긴 한데 어떤 애가 혼자 맞고 가길래 걔한테 줬어."


"학교에서 우산을 빌려줘?"


아이는 끄덕거리며 자신의 옷에 묻은 빗방울을 보란 듯이 손으로 터는 시늉을 했다. 나에 대한 원망이 눈빛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엄마는 어릴 때 비 맞으면서 놀았던 거 재미있었는데……."


어느새 아이는 자신만의 쉬는 시간에 접속했다. 비 오는 날의 추억을 선물하고자 했던 나의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날 이후, 아이는 마른하늘에도 늘 3단 우산을 고이 가방 옆주머니에 챙겨가지고 다닌다. 오늘은 절대 비가 오지 않으니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 해도 고집을 부린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른다면서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건 뭐 중경삼림에 나오는 노랑머리(임청하) 여자가 비옷에 선글라스를 쓰는 것과 같은 대비 방식이다.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선물하고 싶었던 나의 계획은 그야말로 산산조각 났지만 그 덕분에 나의 추억을 생생하게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다. 


첨벙첨벙. 


그 시절 나와 친구는 작은 웅덩이에 발을 조심스레 내디뎠다가 이내 첨벙 담갔다. 젖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면 어딘가 모르게 몸도 마음도 찜찜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빗물을 온몸에 튀기며 놀았다. 찜찜해지더라도,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나이였기에. 


타악. 탁. 타악. 탁. 


어떤 날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나의 시간들이 하염없이 빗물에 쓸려 이곳에 도착했다. 내일은 그런 비가 내려주었으면. 화창한 대낮에 상상해본다. 쭈그려 앉아 우산 표면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손으로 그 소리를 받을 수 있진 않을까 그때보다 커진 손을 살며시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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