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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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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May 14. 2024

석양이 질 때


“지금 우리가 이걸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야.”


“엄마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집에 가는 길 석양이 보이면 그 색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쫓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 그냥 손이라도 뻗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내가 딱 아이만큼의 나이였을 때 소독차를 쫓아 뛰어다니던 날에도 하늘빛은 아주 잠깐 동안만 그러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리는 그런 순간처럼, 그런 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음에도 그런 것들은 예고 없이 자주 나타나 익숙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기억은 곁에 왔다가 사라진다. 모든 순간 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각자만의 기억을 우리는 추억, 낭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리 쫓아도, 손에 닿을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을 가진 것들이 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시간에 속한 모든 순간이 그렇기도 하다. 시간을 내지 않으면, 마음을 쏟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고야 마는 수많은 것들. 석양이 질 때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어 진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그저 응시하며 그 순간에 존재하고 싶어 진다. 그것은 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저 걷다가 마주하게 되는 석양은 언제나 행운처럼 여겨진다. 애써 기다리지 않았음에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날씨에, 그런 순간에 거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 순간 누군가 곁에 있으면 그 기쁨은 더 커진다. 저것 좀 봐, 하며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으니까. 마음이 보드라워진다. 젖었던 신발이 적당한 볕에 뽀송하게 마른 것처럼, 울적했던 기분이 신기하게도 자기 전에 괜찮아지는 것처럼, 마음이 석양의 신비한 색으로 물든다.


지난 금요일, 학교 운동장에 서서 아이와 석양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던 길을 되돌아 그리로 간 것이었다. 석양을 더 보고 싶어서, 그 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아이는 어느새 자라 내가 어떤 말을 자주 하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석양을 볼 수 있다는 건 내겐 행운이었다. 우연한 행운, 아름다운 행운.


그날 오후 아이가 본 것과 내가 본 것은 같았을까. 그날의 석양이 우리에게 비슷한 기억으로 남을까.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우리는 운동장을 벗어나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그동안에도 석양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불을 켜자 비로소 바깥은 어두워졌다.


자려고 누워 생각해 보니 그때의 일이 꿈처럼 느껴진다.

만질 수 없는 꿈, 사라져 버리는 꿈, 그런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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