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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젼정 Jul 30. 2024

나의 여름


눈을 감고 여름을 들어봐. 집에 가는 길 들려오는 매미 소리, 하루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듣는 선풍기 소리, 갑자기 내리는 여름비 소리. 가만히 여름을 봐. 그늘에 앉아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의 표정, 늦은 밤 적막한 공기 가운데 흐르는 느슨한 분위기, 걸을수록 끈적해지는 피부와 견딜 수 없어 일그러지는 얼굴. 어떤 여름을 떠올려봐. 아주 어릴 적 갔었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바닷가 모래사장, 손바닥에 닿는 젖은 모래와 마른 모래의 촉감, 수영 팬티를 입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아빠의 뒷모습, 크나큰 바다, 어떤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도의 일렁거림, 곁에 앉아 있었던 동생의 작은 몸, 수돗가에서 설거지를 하던 엄마를 지켜보며 무료함을 달랬던 나의 여름 한 조각.


영화 ‘애프터썬’에서 소피가 기억하는 여름. 어떤 시절의 여름은 그런 식으로 영원히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무심코 본 것들을 눈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체득하게 되는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런 것일까. 불투명하게 기록된 시절이 때때로 선명하게 떠올라. 희뿌연 물기를 머금은 목욕탕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았을 때 아주 잠깐 보이는 그런 선명함처럼, 여름은 뜨겁고 끈적해 잘 보이지 않다가도 예고도 없이 명확하게 정체를 드러내기도 해.  


언제나 여름은 거기에 있었어. 너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거야. 아니, 그게 전부는 될 수 없었던 거야. 좋아했던 순간이 거기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모든 게 싫었던 건 아닐지도 몰라.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이 내게 말해. 눈을 감고 지나온 여름을 생각해. 언제나 비슷하게 반복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여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여름. 그런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확인하는 여름의 어느 날, 나는 또다시 여름을 쓰기 시작해. 여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내게 남은 여름을 기억해 내고 지금의 여름을 느끼고 앞으로의 여름을 기대해. 나의 여름은 지금 여기에 있어. 아주 뜨겁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가끔은 알 수 없이 그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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