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 이름을 가장 자주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라, 생각보다 없다.
별명이나 직함,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누나가 아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들이 누군지 떠올려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남편이다. 엄마, 아빠는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본론을 이야기한다. 친한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뭐해?'로 시작하는 대화에는 이름이 필요치 않다. 내가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젼정'도 진짜 내 이름은 아니다. 나이가 먹으면서 나는 이름 대신 많은 호칭을 얻었다. 전 회사 직장동료들은 나를 아직도 직함으로 부른다. 가끔 '언니'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동생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고, 아이는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끼리는 아이의 이름 뒤에 엄마를 붙여 '누구 엄마'라고 부른다.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는 사람은 정말 남편뿐인가.
회사에 다녔을 때도, 출산을 했을 때도, 전업주부로 살아갈 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회사를 퇴사하는 것과 동시에 의미가 없어지는 직함, 출산 후 아이의 이름으로 대체되는 나의 존재, 전업주부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내 이름은 아련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행복하고 아리고 즐겁고 무덤덤한
삶의 모든 순간에 이름이 있다.
이름들 / 박훌륭 작가
얼마 전 '이름들'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 작가님은 '아독방'이라는 서점을 운영하신다. '아독방'의 뜻은 '아직 독립 못한 책방'이라는 뜻으로, 샵인샵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약국과 서점이라니, 참 알 수 없는 조합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연히 '아독방'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된 나는 계속해서 그곳의 피드를 지켜보았다. 약국에서 일하시는 것 같은데 춤추는 영상이 심심치 않게 올라와서 신기했다. 책 소개 글과 이벤트도 자주 올라와서 댓글을 종종 달았다. 대기업 이벤트 아니면 그렇게 댓글을 단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뭐에 홀린 듯이 댓글을 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약사님이자 책방 주인이자 춤꾼이신 박훌륭 작가님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재빨리 책을 구매하지는 않고,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짝 궁금했다.
춤추는 약사님의 이름은 '박훌륭'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독방'이라고 마음대로 오해했는데 아니었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에 있는 이름들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이들의 이름들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관계를 시작한다. 학교에서 출석부를 부를 때도, 병원에서 접수를 할 때도, 소개팅을 할 때도, 인터넷으로 쇼핑을 할 때도, 우리는 많은 순간 이름을 쓰고 부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 신청을 하기도 한다.
그가 '이름들'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사는 방식을 소개한 부분이 인상 깊다. 그는 '도전'이라는 말을 거창하게 포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한없이 소심하고 낯도 가리고 역경의 'ㅇ'만 봐도 일단 피하는 사람,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잘 숨겨서, 조용히 하면 된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글을 통해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양한 시도는 당장 결과를 주진 않지만 그것을 해나가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작은 아버지다. 어질 현, 곧을 정, 현정이라는 이름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나는 내 평범한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어질고 곧게 살고 싶은 내 마음과 이름이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저 내가 '현정'이라고 불릴 때 기분이 좋다. 그것만큼이나 좋은 건 이름 뒤에 붙는 '작가'라는 호칭이다. 작가가 아닌 채로 작가가 된 머쓱한 기분은 나를 순간 얼얼하게 만든다.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다가, 작가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다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그럴 자격이 있나 싶어서 이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구의 누구로 기억되기보다 오직 나로 살아가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소중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불러보자.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별명이나 애칭이 아닌, 이름을 불러보자.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에 나온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들은 나에게로 와서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다.
이곳에서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들의 이름은 길이도 제각각, 언어도 제각각이다. 개성 있는 이름의 집합체라 해도 무방하다. 다양한 이름의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부족한 글을 구독해주셔서,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 어떤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폼나는 직함도, 누구의 누구라는 호칭도, 그것들을 채울 수 없다. 그것들은 내가 나일 때 비로소 채워진다. 내 이름은 젼정, 현정 그리고 작가이고 싶다. 그 애매한 경계에 서서 나는 조용히 '도전'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애매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참고 도서 : 이름들 / 박훌륭 / 꿈꾸는 인생